9월24일 중용은 주님이 원하시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09-24 07:28:40    조회 : 419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제1독서 잠언 30,5-9

5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6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7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9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복음 루카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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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새벽 묵상 글에도 한 번 쓴 적이 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저의 취미는 우표 모으기였습니다. 그런데 우표를 모으다보면 특별한 우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우표를 손에 얻게 되면 애지중지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책을 아낀다고 달력이나 비닐 종이를 이용해서 책표지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저는 책에도 하지 않았던 비닐 덮개를 만들어 우표마다 씌워 보관했습니다. 그 정도로 제게 우표는 소중했습니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표 중에서 제게 가장 귀하다고 생각했던 우표는 우표 발행 연도가 잘못 인쇄되어 두 줄로 긋고서 그 옆에 다시 새로운 연도가 인쇄된 것이었지요. 물론 희소성을 없애기 위해서 틀린 연도 그대로 다시 인쇄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가지고 있는 우표 중에서는 가장 특별했던 것이었습니다.

잘못 발행된 우표. 가치가 더 떨어질 것 같지만, 이런 우표의 가격은 엄청나지요. 하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우표가 우리나라 돈으로 15억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이 우표 역시 똑바로 발행된 우표가 아닙니다. 잘못 발행되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 장의 우표이기 때문에 15억이라는 고가로 거래되는 것이지요.

이 우표를 모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다름’이 가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모두가 똑같으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각자 각자가 다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가 부각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 다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비슷하게 어울리면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성공했다고 하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모으는 데에서만 행복이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집니다.

우표 역시 달라야 가치가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좋아하실 하늘에 쌓을 수 있는 가치를 모으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함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참 따르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다면 주님 앞에서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 충실한 삶.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다름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를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고, 다름을 더욱 더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의 모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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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사람이란 모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코르네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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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느 날, 천사가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네가 너무나 열심히 살아서 너의 인생을 실수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스무 살로 되돌려 주겠다. 어떠냐? 그렇게 하겠느냐?”

솔직히 우리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지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본 나이를 또 사는 것이 어쩐지 재미없고 지루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현재를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문제를 다 가르쳐줬는데도 답을 못 맞추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했던 실수는 또 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래서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간이기 때문에 신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으니까요.

과거에 연연하는 내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고, 대신 현재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쓸데없는 망상만 늘어나지만, 현재에 충실하면 밝은 미래를 만들테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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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중용은 주님이 원하시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

2014년 가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복음: 루카 9,1-6

< 중용은 주님이 원하시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 >

지구에 인간이 살고 있고 지구 외에 다른 생명체가 공식적으로 발견된 것은 지금까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태양에만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요? 다른 별로 옮겨가면 왜 살 수 없을까요? 지구는 있어야 할 딱 그 자리를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 쪽으로 조금만 앞으로 가도 우리 모두는 타버리고 조금만 뒤로 가면 얼어버립니다.

우리 삶에서도 모든 면에서 이 가장 적당한 중용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타버리기도 하고 얼어버리기도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너무 많이 축적하여 이웃을 배고프게 만들고 자신은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배고픔과 씨름해야 하고 결국 3천 원짜리 주사가 없어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리고 부자는 부자 나름대로 더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이런 처지를 한탄하며 나누지 않는 이들을 원망합니다. 이런 모든 차별적인 세상이 하느님이 만드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몰라 헤매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로 이 자리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그저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것만 청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양이 가장 적당한 양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특별히 ‘오늘’이라면 ‘내일’ 또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만 먹고 내일은 안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의 눈물’ 다큐에서 그 원시적 삶을 살아가는 부족들이 ‘오늘’ 먹을 양만 수집하면 시간이 많이 남아도 사냥을 멈추고 돌아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저 배고프지 않을 정도, 헐벗지 않을 정도, 이슬을 맞지 않을 정도만 가지고 살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 세상 자체가 곧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빼앗으려 하지 않고 쌓아두려 하지 않으며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중용의 자리를 벗어나 너무 극단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들의 풀도 솔로몬보다 잘 입었고 하늘의 새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믿고 내일 걱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내일 걱정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지나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우주로 튕겨져 나가려는 힘과 태양의 끄는 힘 중간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우주로 튕겨나가지도 않고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지구가 우주와 태양의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의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그리스도는 타볼산에서 변모하시어 완전히 하느님과 같이 되셨지만 또한 세상으로 내려오시어 바로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십니다. 타볼산에 눌러 앉지도 않으시고 기도를 한다고 사람을 멀리하지도 않으십니다.

체조경기 중 평균대는 높이 125㎝, 길이 5m, 폭 10㎝ 나무 위에서 펼쳐집니다. 선수들은 90초간 그 좁은 평균대 위에서 뛰고 돌고 구르며 연기합니다. 바로 그 좁고 긴 자리를 벗어나면 실격 당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나의 자리에 집중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 공중돌기만 하다가는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어떤 운동이든 공을 끝까지 보지 않으면 잘못 맞아 원치 않는 곳으로 공이 날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을 끝까지 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공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앞을 보다가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바로 이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얼마만큼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들어야하는지, 얼마만큼 벌고 얼마만큼 나누어야 하는지, 얼마만큼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무엇을 해도 의미 없는 행동이 됩니다. 결국 중용을 지키는 방법은 ‘바로 지금’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벗어나게 된다면 오늘 독서에서 나오는 이런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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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희망의 기쁜 메시지와 병든 마음 치유
 
2014년 가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 9,1-6

희망의 기쁜 메시지와 병든 마음 치유

좋아서 기뻐하고 영육의 병에 도움 줄 뉴스들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뉴스들은 온통 어둡고 무거운 기분이라서 마음에 스트레스만 안겨주네요.
오늘도 중동IS조직 폭격, 태풍, 정치인들의 불통 등이라  기분 침침합니다.

먹고 살 희망이 없는 시절에 원조하는 나라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살 희망이 없고 사는 게 지옥 같을 때 하늘나라가 있다니 다행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은 희망의 기쁜 소식 전하고 병든 마음 치유에 전념해야지요.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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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 9,1-6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저의 세례명처럼 과연 저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였는지 돌아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축일을 기억하는 것은 축일로 정한 성인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축일 축하 행사를 하곤 했습니다. 영적, 물적 선물을 주시기도 하셨고, 축하 노래를 불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젊은 신부에게 쑥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더 열심히 살라는 격려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강의를 부탁하면 저의 삶을 함께 나누려 하고 있습니다. 성소국의 일 이외에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새천년 복음화 사도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 해 주소서.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소서.’ 오늘 잠언의 기도입니다.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법정 스님이 ‘무소유’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린다면 참된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장자도 ‘빈 배’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한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그 배 안에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 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 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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