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 제발 돌아오라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03 08:07:42    조회 : 483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욥 38,1.12-21; 40,3-5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복음 루카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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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무로 사람들은 ‘대나무’를 뽑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서 유일하게 생존했던 나무가 바로 ‘대나무’이거든요. 그래서 이 대나무는 몇 년 동안 전혀 자라지 않아 ‘죽었나?’ 싶어도 꾸준히 물을 주면 어느 날 갑자기 새순이 돋고 하루에도 수십 센티씩 쑥쑥 자랍니다. 부지런히 땅속줄기에 양분을 모두 보내서 다음 세대 양성에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 대나무를 보면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특히 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또 내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가 30년이 넘었으니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것이지요. 옛날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들은 평범한 공무원과 선생님 생활을 하고 있고, 공부도 잘하고 말썽을 하도 많이 부려서 선생님께 매일 혼나던 친구들은 유명한 배우도 있고 회사의 CEO가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30년 전에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하긴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가 신부님이 될 지는 정말 몰랐다.”

우리의 삶은 지금을 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단지 지나가는 과정 중의 한 부분이며, 내 나머지 삶의 시작점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대나무가 쭉쭉 자라듯, 언젠가 내 삶의 또 다른 반전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를 꾸짖습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에 무척이나 번화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원리원칙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랬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음에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닫힌 마음을 보였고, 결국 주님으로부터 하늘에 오를 수 없다는 선고까지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단순히 ‘그렇구나.’라고 생각만 하고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나의 모습은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앞서 이야기했던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반전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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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두려움은 당신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꿈을 이루려는 당신의 능력을 방해한다(스티븐 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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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의 가격(‘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어제 인터넷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휴양도시 니스의 한 카페에는 이런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 Coffee! 7 Euro.
⊙ Coffee Please! 4.25 Euro.
⊙ Hello Coffee Please! 1.4 Euro.

우리말로 바꾸면.

⊙ 커피 - 라고 반말하는 손님은 ‘1만 원’을.
⊙ 커피주세요 - 라고 주문하는 손님은 ‘6천 원’을.
⊙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 ? 라고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주문하는 손님은 ‘2천 원’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발한 가격표를 만든 카페 주인은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카페에서는 말 한 마디를 예쁘게 하는 것으로 똑같은 커피를 5분의 1가격으로 마실 수 있는 셈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나의 인격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데, 나의 인격을 깎아먹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나를 높이는 길은 남을 먼저 높였을 때 가능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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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생일대의 과제인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회개는 아무런 노력 없이 한 순간에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회개란 말마디의 어원을 살펴보면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강의 상류를 따라 올라가듯 위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분은 곧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한결 같이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당신을 멀리 떠나간다 할지라도 늘 우리의 귀향을 기다리시는 인내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눈동자처럼 여기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한없는 연민의 정과 측은지심으로 우리 내면의 상처를 눈여겨보시며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계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원래 무(無)였습니다.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오늘 우리는 이 땅위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온전할 수 없는 흙부스러기 같이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마지막 단계인 세 번째 단계는 아주 간단합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토록 크신 사랑의 하느님, 너무나도 은혜로운 하느님에게로 우리의 발걸음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실체를 파악한 우리가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빨래를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빨래 안하고 사는 방법 없을까?’ 잔뜩 쌓인 빨래를 세탁기 안에 넣고 돌렸습니다.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널려고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5만 원짜리 고액환 한 장을 주머니 속에 넣고 돌렸지 뭡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바지 호주머니 속을 살펴보니 다행히 색상만 조금 옅어졌을 뿐 물을 잔뜩 머금은 5만 원 권 지폐가 그대로 접혀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리미로 다렸더니 감쪽같이 신권처럼 변화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들도 실수로 우리도 모르게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한번 들어갔다고 우리 인간의 존엄한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번 중죄를 지었다고 우리 인생 완전히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세탁기 속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물에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의 가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죄인이어도, 흠이 많아도, 별의 별 상처투성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십니다. 이토록 한결같은 하느님, 언제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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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독서: 루카 10,13-16
 
< "제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

저는 군에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그때 인사계들이 있었는데 계급은 상사였고 대부분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어렸을 때 군대에 들어와 제대하지 않고 군대말로 말뚝을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는 저희 아버지뻘 되었지만 아버지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조금은 다혈질이고 또 조금은 무식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전방 철책 순찰을 하다가 아직 따지 않은 두릅이 많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산 숫두릅은 맛있고 영양도 좋아 값도 비쌌습니다. 인사계와 저는 차를 세우고 그 곳으로 뛰어 내려가 두릅을 열심히 채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한 사병이 우리가 있는 곳이 지뢰밭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인사계도 그랬습니다. 인사계는 칼을 꺼내더니 땅을 조심스럽게 찌르며 자신이 밟은 곳만 밟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사계는 칼로 찌르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만을 밟으며 안전한 곳으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인사계의 발만 보며 다른 곳을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를 따랐습니다.

사제가 되어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신자들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동의하지 못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이 중요하지 사제나 교회가 말하는 것에 굳이 순종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합니다.

군대에서는 한 달 먼저 들어와도 그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밖에서 무엇을 했던 상관없습니다. 군대라면 군대에서 생활했던 경험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일류대를 나와도 고등학교만 나온 선임에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런 경험을 무시하고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한 반박문을 내걸었음에도 교회는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그 전통적 가르침과 수많은 교회지도자들보다도 더 현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저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오랫동안 믿어왔다면 저들이 내 개인의 생각보다 옳지 않을까?’하는 마음을 가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교만이란 것이 믿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욥기인데 욥의 갈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욥만큼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 없지만 욥은 자신의 모든 자녀들과 재산과 건강과 아내의 존경, 친구의 우정까지 잃어버립니다. 남은 것이라곤 끈질기게 붙어있는 생명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합니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합니다. 욥도 차마 입으로 그 원망을 쏟아놓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느님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욥에게 그렇게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세상에도 욥을 통해서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도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의도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인 우리들은 조금만 안 좋은 일이 벌어져도 하느님의 생각이 우리보다 짧은 것인 양 불평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오늘 욥에게 물어보았던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도 물어보실 것입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는지, 땅을 뒤흔들 수 있는지,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는지,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는지, 죽음의 대문에 가 본 적이 있는지, 빛과 어두움의 자리가 어디인지 등을 말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드셨다면 이런 것들이 대해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 욥이 대답한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은총임을 믿으며 다만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을 수 없다면 하느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모든 교회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욥이 하느님께 승복하였듯이 하느님의 섭리에 또 교회의 가르침에 승복할 수 있는 겸손함을 지녀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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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정치에 관여했으나,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이 말은 ‘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에 대한 담당 판사의 판결입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외도는 했지만 불륜은 아니다.’, ‘터치는 했지만 성희롱은 아니다.’, ‘물건을 가져왔지만 도둑은 아니다.’ 말이 일관성이 없고, 보편성이 없어 보입니다. 정치에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을 했다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면 되고,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으면 음주운전이라고 하면 되고, 외도를 했으면 그것이 불륜이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터치를 했으면 성희롱이며,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왔으면 그것이 도둑인 것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보편성과 일관성이 없던 인류의 역사에서 ‘보편성과 일관성’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려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인가?’를 성찰하였습니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저술한 새무엘 크레이머는 ‘밤에 꿈을 꾸면 아침이면 사라지지만 낮에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의 신화, 역사, 문학, 신학, 종교의 원형을 ‘수메르’에서 찾았습니다. 밤에 꾸는 꿈은 자면서 꾸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낮에 꾸는 꿈은 의지와 비전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보편성과 일관성을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 하십니다. 욥은 하느님의 보편성과 일관성 앞에 겸손하게 순명을 하였습니다. ‘희로애락, 생로병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보편성과 일관성입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온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일 미사를 참례하지 않지만 냉담자는 아니다. 미워하고 불평을 하였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하느님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에도 ‘기본기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봅니다. 지도에는 한결같이 ‘현 위치’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하는 신앙인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릇된 길로 가곤합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도 올바른 방향으로 사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매일 드리는 저녁기도에도 반성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이 한 죄를  뉘우치오니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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