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기도의 힘

작성자 : 김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31 07:21:39    조회 : 432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필리 1,1-10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오로와 티모테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필리피의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감독들과 봉사자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은총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루카 14,1-6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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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마도 방송에서는 예년처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가사를 품고 있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튼 이제 2014년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시간의 빠름을 여지없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는지, 혹시 후회할 날들을 만들기만 했었던 것은 아닌지…….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2014년을 더욱 더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10월의 마지막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요즘에 교육을 받으러 강남에 갑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강남역 지하철로 들어서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지하철 입구가 마치 엄청난 사람들을 토해내고 집어 먹는 거대한 입처럼 느껴지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을까? 이 복잡한 곳이 뭐가 좋다고 사람들은 이 거리에 올까?’ 싶었습니다.

제가 사는 답동은 늘 한산한데, 왜 이곳 강남은 사람들이 많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믿기 때문이지요. 물론 믿는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소문들을 이렇게 굳게 믿어 주면서도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믿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믿지 못함이 주님을 향하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믿음을 항상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믿는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근거 없는 판단만을 따를 것이 아니라, 늘 우리를 지켜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저 예로부터 내려온 관습과 자신들의 일반적인 생각만을 내세워서 안식일 법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영적 제물인 거룩하고 덕성스러운 삶으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것임을 모르기에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도 사랑의 실천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실 안식일 법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사적인 일에 집중함으로 인해 하느님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관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사랑의 실천 역시 하나의 일로 취급합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이제 과감하게 거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판단하는 것,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해서 해를 가하려는 모습 등등 우리가 거두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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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늙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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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인에게 굳은살은 어디에?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강의 시간을 이용해서 강의 내용에 적합한 노래를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불렀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타 실력이 형편없었거든요. 따라서 매일 한 시간 가까이 기타 치는 연습을 해야만 했습니다. 연습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오른 손가락 끝은 부드럽지만, 기타 코드를 잡는 왼손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이게 되더군요.

사실 처음에 기타를 많이 치다보면 코드를 잡는 왼손 손가락 끝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습의 반복으로 인해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상태가 옵니다. 바로 굳은살이 박이게 될 때입니다. 왼손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이게 되었다고 해서 제가 부끄러워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래도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볼 수 있었기에 기뻐했습니다.

굳은살은 어쩌면 그 사람의 신분증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굳은살이 생겨야 그 부분의 아픔도 사라지게 됩니다. 언젠가 어떤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발이 인터넷 상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발가락에 엄청난 굳은살이 박여서 너무나 못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따지고 보니 열심히 한 사람치고 굳은살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작가들도 굳은살이 있습니다. 연필을 잡는 손 가운뎃손가락 첫째 마디 옆면에 있지요.

우리 신앙인에게는 어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어야 할까요? 기도할 때 꿇는 무릎? 아니면 손을 합장하기에 손바닥? 솔직히 죄를 짓는 마음에 굳은살이 박였으면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가 쳐들어와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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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기도의 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필리1,1-11 루카14,1-6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 14,1-6

기도의 힘

"나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18,1)

오늘은 묵주기도 성월 10월 마지막 날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기도의 힘이요, 기도의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할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어제 저는 집안의 최고 어른인 93세 고모님을 생전 처음 찾아 뵙고 엎드려 큰 절을 올렸습니다.
이제 다 돌아가시고 한 분 뿐이 안계신 어른이기에 돌아가시기 전 꼭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로서 정말 '기도의 사람'인 고모님이십니다.
몇해 전 90세까지, 평생 하루도 거르지 않고 5시 교회의 새벽기도에 참여하셨고,
80세 후반까지도 매일 성서를 필사했다 하셨습니다.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하신,
6남매 모두 훌륭한 신앙인으로 키운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고모님이십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실 영육의 건강에 기도보다 더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바오로의 기도입니다.
진정 기도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기도할 때 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기도는 사랑임을 입증하는 진정성 넘치는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이 아닌 교회공동체 형제들을 위한 순수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더불어
이웃 형제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순수한 사랑의 기도요,
기도와 더불어 순수해지는 마음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또 타고난 순수가 아니라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사랑의 기도와 실천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저절로 따르는 영육의 건강입니다.

영양식이나 건강식품, 온갖 운동보다 더 좋은 건강을 위한 처방이 바로 기도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자비와 지혜와 용기입니다.

기도의 힘은 순수한 마음의 힘이요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그 분별의 지혜와 용기가 놀랍습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수종병자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미 물음에 답이 들어있기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육신의 병 못지 않게 심각한 완고함이란 마음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과 지혜, 용기의 원천은 바로 기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순수한 마음이요,
이런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힘인 사랑과 지혜, 용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 성체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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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해방과 기쁨의 날로 지켜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 14,1-6

해방과 기쁨의 날을 지켜라.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 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 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 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 살이 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 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국가보안법’이니‘긴급조치 법’,‘유신 법’등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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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 14,1-6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군 생활은 큰 변화가 없이 늘 비슷한 생활입니다. 사무실 업무 보고, 경계 근무를 서는 일들입니다. ‘짠밥’이라고 불렀던 식사도 늘 그렇고 그랬습니다. 가끔씩 설날, 추석, 국군의 날 같은 특별한 날에는 특식이 나왔고 그것이 군 생활에 활력을 주곤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한 지 4년이 넘었습니다. 강론을 잘 하기 위해서는 4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말씀, 삶, 시대의 징표 그리고 기도’입니다. 군대에서 특식을 먹던 것처럼 가끔씩 좋은 분들의 특강을 준비하곤 합니다. 지나 주에는 ‘향심기도’를 전담하시는 신부님의 특강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도 매일 기도를 하지만 기도를 전문으로 하시고, 강의를 하시는 분이 이야기를 함께 듣고 싶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 제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염경기도, 묵상, 정감기도, 머무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도에는 3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기도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기도의 틀이든지 이 3가지 요소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맛있는 음식점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맛’입니다.

기도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흙탕물은 흔들면 더 혼탁해 집니다. 흙탕물은 가만히 있으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흔들리는 우리들은 기도라는 과정을 통해서 맑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왜 이렇게 흔들렸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묵주기도를 통해서, 어떤 분은 묵상을 통해서, 어떤 분은 대화를 통해서, 어떤 분은 그저 조용히 머물면서 ‘정화’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였든지, 정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조명’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단풍이 아름다워도 밤에는 단풍구경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인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빛이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면 미움, 분도, 시기, 질투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 용서, 인내, 평화입니다. 지난 교황 방한의 주제는 ‘일어나 비추어라’였습니다.

기도는 ‘일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양들도 그 음성을 잘 알아듣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무르면 나도 여러분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포두 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나는 여러분들만 아니라면 오늘이라도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 때문에 흐려진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비추면 좋겠습니다. 내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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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우리는 옳은 공감(共感)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는 옳은 공감(共感)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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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요?
말 그대로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내용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은 인류가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낸 상식이라는 것들이 지켜질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온갖 종류의 범죄는 상식을 거스르는 일들입니다.

상식(常識/Common Sense)이란 무엇인가요?
글자가 의미하는 대로 ‘항상 누구에게나 통하는 지식이나 느낌’을 뜻합니다.
희로애락에 대한 이유와 느낌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 말의 의미가 무색하기까지 합니다.

비상식이 만연하면 상식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악마의 가장 큰 노림수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의 잔악성이나 폭력성 역시 바로 이런 비상식적인 감각이 만연되었을 때 드러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생명들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도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는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역시 비상식적인 감각들이 만연한 탓입니다.

신앙인들이라도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복음적으로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복음적 상식이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오감과 생각을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소가 아니라 자식이 우물에 빠졌는데도 다른 짓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 각자가 상식적이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이 있는데 내 배 부르다 해서 행복하다 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인 세상이기를 희망합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인 세상을 희망합니다.
누군가의 옳은 기쁨에 함께 기뻐하는 것이 상식인 세상을 희망합니다.
추악하게 얻어 휘두르는 권력은 끝이 좋을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인 세상을 희망합니다.

우리가 공감(共感)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옳은 공감이어야만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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