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8일 순교자의 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12-28 07:21:27    조회 : 470회    댓글: 0

◈ [인천] 고통안에 주님의 선한 섭리가

2015년 다해 12월28일 월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1,5―2,2

복음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8

살다 보면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주님의 조치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주님의 외면과
침묵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게 되지요. 그때는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은 1년 내내 기도해도 일이 안 풀리는데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드는 생각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지요.

언젠가 기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터널 속이 어둡다고 절망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터널의 끝이 올 것이고, 이
어두움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겪는 고통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두움의
고통이 계속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밝은 빛이 비추는 평화와 기쁨도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지요.

분명히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이
찾아오리라는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미래를 예견한 악마는 그분께서 아기일 때부터도 그분을
없애고자 필사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주님께서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아직 힘없는 아기일 때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시켜
이집트로 피신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 안에서 커다란 희생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학살당한 아기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채 꽃도 피우지 못한
아기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억울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억울함과 슬픔은 계속해서 지금을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억울함과 슬픔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그래서 그 뜻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힘차게 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금방 불평하고 주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집니다. 여기에
고통이 더 심해지면 받은 은총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면서
감사한 마음을 물론이고 부족한 믿음마저 흔들립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주님의 선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 풀
수 없는 문제에만 매달리면서 할 수 있는 것, 또 해야 하는 것들을
내팽개친다면 어떨까요? 어두운 터널 속을 벗어나서 터널 밖의 밝은
세상을 지향하며 산다면 분명히 주님의 뜻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

인간을 사랑할 것. 아무리 나약한 인간이나 초라하고 불쌍한 인간도
사랑할 것.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지 말 것(생텍쥐페리).

*****

내 마음의 안경을 깨끗이

신부가 되고 얼마 후에 동기 신부들과 여행을 함께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승합차를 빌려서 모두가 함께 떠난 여행이었지요. 신나게
떠들면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두 명이 차 안에 앉아 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동창신부가 다급한 소리로 이렇게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라이트 켜.”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다들 잠에서 깨었지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리를 친 동창은 운전 보조석에 앉아
있었는데, 잠깐 졸았나 봅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떠 보니 너무나
캄캄해서 차가 터널 안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라이트를 켜지 않은 것 같아서 다급하게 라이트를
켜라고 외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터널 속을 지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벌건 대낮이었는데
라이트를 켜라고 외치니 무슨 소리인가 동창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요. 이 보조석에 앉아 있던
동창신부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저분한 안경을 쓰면 당연히 깨끗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깨끗하게 해야 깨끗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더 많아지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에 씌고
있는 안경을 닦지 않으면서, 남에게 안경을 깨끗하게 닦으라고만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남을 탓하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내 마음의 안경을 먼저 깨끗이
닦았으면 합니다. 흐릿한 세상이 아니라, 맑고 선명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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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15년 다해 12월28일 월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 2,13-18
 
제 방에는 베개가 2개 있습니다. 하나는 가볍고 푹신하여 늘 가까이
하는 베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침술원 선생님께서 권해주신 ‘대나무’
베개입니다. 조금은 딱딱하고 불편하지만 목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목이 불편해서 ‘침술원’을 찾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목이 ‘일자목’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일자목이 되면 디스크가 올
수도 있고, 목이 아프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목은 ‘C’자 목의
형태가 되어야 목의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침술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나무 베개를 사용하였더니, 목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습니다.   

인류가 직립 보행을 하면서 얻게 된 장점이 많다고 합니다. 첫째는
시야가 넓어져서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립 보행은 머리를
편하게 받쳐 주게 되었고, 용량이 커진 머리의 무게를 견디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성대가 넓게 열려서 언어를 사용하기 용이해
졌습니다. 언어의 사용은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것은 문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기에 도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지금 컴퓨터의 자판도 자유로운 손 때문에 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직립 보행을 하면서 감수해야 할 단점도 생겼다고 합니다.
첫째는 목과 허리의 디스크입니다. 4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들은 목과
허리의 디스크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4 다리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녀 출산의 어려움입니다. 여자들은
걸어 다니면서 자궁이 좁아졌기 때문에 다른 동물에 비해서 자녀를
낳기가 힘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산의 과정에서 위험을 겪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치질과 위장병입니다. 우리의 소화기관은 4발로
걷는 형태에 맞게끔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발로 걷게 되면서
음식을 소화하기도 어려워졌고, 장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져서 치질에
걸리기 쉬워졌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편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설탕이 달다고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몸에 해로운 것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꾸준히 하면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꾸준히 하면
삶의 ‘나침판’이 되어 줍니다. 예전에 ‘전체와 부분’에 대한 집합을
배웠습니다. 작은 것에 얽매이면 큰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여도 작은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세부적인 내용에는 때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국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향해 나가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정의 기록이 성서입니다.
제 몸에도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연탄재에 맞아서 난
상처도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데인 흔적도 있습니다. 다리의 골절로
수술을 받은 자국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 이제 조금씩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매일 아침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여행을 다녀옵니다. 묵상글은 내년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셔요.)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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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함께 지고 가는 고통과 죽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2월28일 월요일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마태 2,13-18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1요한 1,7)

함께 지고 가는 고통과 죽음

오늘은 예수님 때문에 헤로데의 손에 죄 없이 죽은 아기 순교자들의
기념일입니다. 헤로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다인들의 최고회의를
없애려고 300여명의 원로들과 법령위원들을 살해합니다. 그 뒤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장모 알렉산드라, 두 아들까지도 죽이고, 자신이 죽기
전에는 예루살렘 귀족들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다음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하고 묻습니다. 이에 잔인한 폭군 헤로데는 왕권에 위협을 느껴 아예
화근이 될 씨까지 말려버릴 결심을 합니다.

결국 그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2,16)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의 등장이었습니다. 헤로데는 그 정반대편에 있었고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은 이 충돌로 악과
탐욕의 희생제물이 된 셈입니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조차 자기
권력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죄없이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1요한 2,2) 오늘의 헤로데들은 돈과 권력, 탐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폭력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죄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곧 예수님의 고통이요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과 인생사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인간다운 삶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이어져갑니다.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 억울하게 탄압당하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죽은 아기들의 순교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다른 이들의 죽음까지도
사랑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 혼자만의 행복을 찾지 말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 속에
계신 하느님처럼 빛 속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친교를 나눠야겠습니다
(1요한 1,7).

아울러 혹시 내 안에도 헤로데와 같은 교만과 탐욕, 잔인함과 폭력성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소유욕, 자기 힘을 극대화
하려는 야망, 사랑의 섬김과 무관한 힘의 행사와 지배, 선과 정의를
외면하는 태도 등은 결국 또 다른 죄없는 아기들을 죽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도 죄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태아, 전쟁의
희생자들, 의롭고 이타적인 일을 하다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합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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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양승국 신부의 희망 한 스푼-무죄한 이들의 죽음
앞에서...>
 
<양승국 신부의 희망 한 스푼-무죄한 이들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꿈꿉니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죽음. 잘 준비되고,
정리된 죽음. 이왕이면 비참하지 않고, 구차스럽지 않은 죽음. 끔찍하지
않고 큰 고통 없는 순탄한 임종.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죽음,
잠들듯이 그렇게 평화스럽게 떠나는 죽음을 꿈꿉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백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죽음을 접합니다.
평화롭고 품위 있는 죽음과는 정반대의 참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말입니다. 헤로데의 손에 비참한 죽임을 당한 베틀레헴의 두 살 이하
사내 아기들이 그랬습니다. 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죽음이었습니다.
얼마나 미안하고 안타까웠으면 교회는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아기들의 기일을 전례력 안에 넣어 기억해오고 있습니다.

아기들의 부모나 가족들 입장에서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외침이 저절로 나오는
죽음이었습니다. 베틀레헴 아기들의 무고한 죽음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은 아직도 이런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은 또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전조요,
징표요, 서곡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참혹하기에 마치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죽음, 벌을 받은 죽음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죽음 안에는 사실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인들의 죽음을 마냥 칭송만하면서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멀쩡한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미친 운전사’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상 의인들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들의 생애는 언제나 그렇듯이 순탄치 않습니다.
의인의 삶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의인의 나날은 언제나 배고프고
춥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일편단심과 고결한
생애를 높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당신 사랑의 품에 영원히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의인들, 무죄한 이들, 선구자들, 이 시대 또 다른 많은 순교자들은
오늘도 그 외롭고도 괴로운 예언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서 3장 2~4절)

하루 온 종일을 기도 속에 사신다는 노(老) 수녀님과의 통화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마다 눈을 뜨면 ‘오늘이 마지막이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세상과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요즘 저는 하루 온 종일
아기의 예수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외우고 있습니다.”

“저의 일생은 재빨리 저를 스쳐지나가고 사라져버리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 땅에서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밖에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순교를 작정하고 시작한 수도자의 길이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 사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주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난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순교자들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는 못하겠지만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침묵하고 좀 더 너그러워지는 ‘백색 순교’를
실천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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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순교자의 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2월28일 월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 2,13-18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건수는
정부추정치만 년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년 43만 건이라고
하니 소리 소문 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이야기가 뉴스거리였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 않고 지체 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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