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공동체로부터 온 편지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02-15 17:42:21    조회 : 438회    댓글: 0


[4호] 마을공동체로부터 온 편지 (김종남, 2014)
   

* 『모심과 살림』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마을공동체로부터 온 편지

 

글 김종남  (여성주의 풀뿌리활동을 해오다 2014년 초 자발적 백수를 선택해 사회적경제 교육 및 컨설팅 등 마을과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자유롭게 하고 있음.)

 

 

 

 

21세기 서울에서 마을을?

 

영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어렸을 적에는 21세기가 오면 영화에서처럼 뭔가 놀라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천 불 소득 백억 불 수출’이라는 구호가 실현될 1980년을 어린 생각에 마음 설레며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시점들이 과거로 변하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바뀌었으나 꿈같은 세상이 오지는 않은 것 같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산업화와 경제적 부가, 문화적인 진보와 다양성이, 대도시의 번창 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것은 틀림없으나, 그 혜택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갈 뿐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전히 불만과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21세기 대도시 서울에서 전혀 미래지향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과거지향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마을’이 화두로 등장했다. 한국 최대의 도시에서 마을공동체는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마을이 나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마을이 보통명사이고 다양하게 쓰이는 용어이므로, 이 글에서 마을은 ‘공동체적 관계망’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의미가 강한 ‘동네’와 달리, ‘마을’은 일정한 공간과 경험과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다시 말해 이웃사람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마을사람 없이 텅 빈 동네는 있을 수 있지만, 이웃사람 없이 마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마을공동체’라는 말은 기존의 ‘마을만들기’라는 정부정책 혹은 일단의 민간 활동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므로, 이 글에서 마을은 곧 공동체를 의미한다. 마을공동체라는 용어는 필요해서 생겨났을 뿐 동어반복에 가깝다.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서울에서 마실 나가는 범위였던 마을은 훨씬 넓어졌고, 매우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과거와 달리 강한 개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공동체라는 점도 추억 속 마을과 전혀 다른 특징이다.

 

 

서울살이

 

서울살이 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값은 필요와 기능에 따른 이해관계이다. 자본과 권력, 인기와 명예, 욕망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밀도로 몰려 있는 도시 서울에서 일상과 활동과 사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 정이 오가는 공동체적 관계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하면 전화, 문자메시지, SNS를 통해서 상대방을 찾아 먼저 연락하고, 급하면 직접 만나러 달려가곤 한다. 하지만 내게 필요 없으면 가족과 친척이든 오랜 친구든 옛 동료든 일이 년, 아니 십 년 동안 전화 한 번 하지 않게 된다. 멀리 있는 사람뿐 아니라, 바로 옆집 앞집 사람들조차 만날 필요나 기회가 없으면 몇 년쯤 모른 채 살아가도 별로 불편할 것이 없는 생활이 서울살이의 기본값이다.

서울살이의 인간관계에서 필요와 기능에 따른 이해관계가 정서적 공감과 연대에 기초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압도하고 있다. 빠른 산업화 도시화 과정의 이면에서 공동체적 관계는 훼손되고 축소되어 왔다. 군중 속의 고독으로 상징되는 익명성이 확산되고, 대면관계에 비해 비대면관계가 훨씬 넓게 그리고 자주 발생하고,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소외시키는 비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확장되어, 결국 관계마저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비인간적인 가치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져 왔다. 서울살이는 지난 삼십여 년 유행처럼 떠돌고 있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가치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꽤 우울한 것이었다. 국가는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에 진입하고 서울은 그 중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성장하였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감은 더 낮아져서, 청소년과 노년층의 높은 자살률, 비정규직과 고용불안계층의 증가, 높은 부동산 비용으로 인한 주거불안, 치솟는 사교육비로 인한 가계 부담, 이웃 간 소음과 주차 문제로 인한 극단적인 사고 등 서울 시민에게 삶의 질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현상들은 통계나 사건들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객관적인 수준의 문제들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서울은 일부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비생태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개조되어 왔다. 하루 아니 일주일 내내 흙을 밟아볼 기회를 가져보기 힘들 정도로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어, 일부러 산이나 공원에 가서야 잠깐이나마 흙을 밟아볼 수 있다. 위생과 치수, 편리함을 위해 서울 대부분의 공간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시멘트 바닥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온갖 살충제를 가로수와 골목골목에 뿌려대고 있어 벌레나 곤충 또한 살 수 없고, 그래서 먹이가 부족해진 새들은 서울을 떠나간 지 오래이다.

 

 

서울의 마을살이

 

동네와 골목으로 눈을 돌려 마을살이를 살펴보면 더 심각한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서울의 마을들은 자족 기능을 상실한 채 잠깐 쉬고 잠을 자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출산, 육아, 교육, 놀이, 일, 축제, 장례 등 과거에는 집안과 마을에서 해결되었던 대부분의 영역들이 어느새 상품으로 변해 가격을 지불해야 구할 수 있게 됐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산부인과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고, 평생을 지불하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도 장례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 또 지불해야 한다. 마을에서 산파 역할을 하는 이웃의 도움으로 출산하고, 마당에서 마을장을 치르며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일들이다. 육아와 교육도 그러하다. 예전처럼 육아와 교육의 대부분을 집안이나 마을에서 해내기는 힘들다 해도, 공동체적 관계가 있으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시 보육, 아동 보호, 자녀 교육의 대부분이 대가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학원,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몫으로 되어버렸다. 놀이문화는 고도로 상업화의 길을 걸었다. 테마파크, 수영장, 극장, 스키장 등 짜릿한 놀이가 가능한 곳들은 높은 가격을 받는 상품이라는 점과 마을에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직장과 일터도 그렇다. 마을에는 돈이 없고 마땅한 일자리가 부족해서 돈을 벌려면 한두 시간 이동해서 벌어 와야 한다. 마을에서 버티고 있는 골목경제 주체인 자영업자들은 이제 몇 가지 아이템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구멍가게와 잡화점은 대자본의 편의점에 점령당했고, 채소가게 과일가게 옷가게 전통시장 등은 대형할인매장과 백화점 그리고 인터넷 쇼핑몰에 점점 밀리며 일부만 살아남아 있다. 이런 자영업자들의 생존율은 비참한 수준이어서, 서울의 경우 자영업자의 5년 생존율이 30% 수준이고, 그 중 절반을 차지하는 음식업종의 생존율은 20% 미만이다. 서울의 마을들은 자족 기능을 상실하였고, 마을에서는 일도 놀이도 교육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마을은 재미없고 후진 곳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은 서울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도시 근교의 한갓진 동네를 가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여서, 지난해에 마을 강의를 하러 가본 경기도 오산시 서랑동도 이러했다. 전통적인 자연부락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서랑마을은 수십 호로 이루어진 아담한 동네였는데, 이 동네에서는 그 흔한 과자 한 봉지를 살 수가 없었다. 가게라고는 길가에 남아있는 식당이 유일했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장을 보러 영화를 보러 병을 치료하러 장례를 치르러 오산시나 수원시까지 나다니고 있었다.

과거에 비해 개인 소득이 스무 배 이상 늘어나고, 물질적으로는 더 이상 풍요로울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데 우리는 왜 늘 허전하고 아쉽고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의 일부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공동체적 관계망이라는 마을 범위 안에서 무료로 또는 품앗이 방식으로 해결되던 많은 과제들이, 이제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이는 화폐로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와 달리 너무 많은 물품과 서비스를 구입해야 서울살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집안과 마을에 머무르지 않고 다 새어 나가는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 SSM, 편의점, 주유소, 통신사 등등 집안과 마을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거액의 순이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장치가 있는 한, 달리 말해 가격을 지불하도록 사실상 강제하는 장치가 곳곳에 있는 한 마을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마을이 풍요로워지려면 화폐로 표현되는 가치를 벌어들이는 것보다는 가급적 돈이 새어 나가지 않고 마을 안에서 돌 수 있도록 골목경제와 마을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방법이 필요하다. 마을사람들을 찾아서, 즉 공동체적 관계망을 복원해서, 상조회사와 보험회사에 회비를 낼 것이 아니라 마을 상조회를 만들어 내고, 학원에 사교육비를 낼 것이 아니라 교육협동조합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고, 테마파크와 TV를 통하지 아니하고 아이들끼리 할 수 있는 놀이를 제공하고, 정체불명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김치를 사먹을 것이 아니라 서너 집이 모여 일 년에 두세 번 김치를 담아서 나눠 먹는 방법이다.

서울 마을살이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동과 청소년, 청년들은 대학입시와 스펙 쌓기에 내몰리며 마을을 떠나 어딘가에서 더 훌륭하고 큰 뜻을 품고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다. 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집단은 다름 아니라 그 부모세대이다. 웬만한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가난하고 낙후된 마을에서 성장해서 살아가기보다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학력과 스펙을 쌓아 번듯하고 안정된 삶을 ‘마을 바깥 어딘가’에서 해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힘없고 보잘 것 없는 마을사람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보다는 부나 권력, 인기나 명예를 얻거나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해관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에게 또 옆집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면서 ‘나처럼 살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동네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어 할까? 혹시 우리 스스로 자신과 자녀와 동네 아이들과 다른 주민들에게 경쟁·성공·효율·생산성의 잣대를 수시로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마을사업 혹은 마을운동이 옛것을 존중하고 전통을 되살리자는 복고적인 지향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마을운동에는 품앗이, 두레, 계 등 예전의 공동체적 방식과 가치를 회복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지만, 개인주의가 일반화돼 있다는 점, 교통·통신이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등 환경적인 여건이 매우 다르다는 점 또한 반영되어 있다.

 

 

공공정책으로서의 마을사업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는 전국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안행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의 철학과 지향은 지난해 발표한 아래 보도자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앞으로 안행부는 새 정부 국정과제인 국민통합과 새마을운동 정신 계승을 위해 주민이 이끌어가는 선진형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사회 약자·소외계층과 함께 나눔의 이웃공동체를 실천해 나가고, 활기차고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지역공동체 활성화 방안 수립, 전문가 그룹 구성·운영, 표준조례 제정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2013.4.22. 안전행정부 보도자료 중)

 

전국의 모든 자치단체의 마을만들기가 안행부와 똑같지는 않겠으나 기본적으로 ‘마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조는 중앙 부처든 자치단체든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에 나타난 새마을운동이나 새마을운동 정신 계승이 문제될 것은 없다. 마을만들기 정책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성과는 ‘만들기’라는 방식 자체가 갖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골목길과 주택을 정비하고 마을회관과 마을도서관과 마을카페를 만들어서 ‘활기차고 살기 좋은’ 동네로 변모시키면 마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아쉽게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마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하드웨어가 개선되어 겉으로 볼 수 있는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나 전문가가 아무리 주민들에게 예산 지원과 콘텐츠를 제시한들 마을사람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만들어지고 그 관계망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마을사람으로 변해나가는 과정이 없다면 여전히 마을은 없는 것이다. 공동체적 관계를 가진 마을사람은 없고 주민등록이나 사업자등록을 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마을의 주인인 주민들이 훼손되고 사라져 가는 공동체적 관계망을 복원하여, 정부 지원의 대상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그런 지원과 도움을 활용하여 주인으로서의 자기 위치와 역할을 복원할 때 마을은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정서적 유대와 신뢰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마을사람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다양한 이유로 수없이 끊어지고 파괴되어 왔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 분양아파트 세대와 임대아파트 세대 간의 갈등을 보자.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임대아파트 주민이 출입을 못하도록 철조망을 두르거나 어린이놀이터 사용을 금지하는 모습은 이웃 사이에서 공동체적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갈등이 있는 아파트에서 함께 텃밭을 일구어 재배한 채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마을음악회를 하면서 소통을 시작해서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관계를 복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일이 년이 아니라 수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수십 가지 계기가 필요하다. 이때 마을음악회와 아파트 텃밭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주민들이 마을사람이고 이웃이라는 관계를 복원하거나 형성하는 과정이자 수단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전마을, 문화마을, 예술마을, 복지마을, 벽화마을 등등 마을에 주제를 입혀서 마을만들기를 해 나가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에서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테마가 있는 마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의 주인인 주민을 지원하여 주민 스스로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거나 강화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은 행정이 주도하는 하향식의 마을만들기 방식을 경계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상향식 사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이나 과거의 마을만들기 사업에 비해 진일보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서울시 마을사업은 주민의 등장을 촉진하고, 주민 스스로 마을을 조사하고 계획하고 사업을 하면서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확장하고 강화하도록 했고, 공동체적 관계망의 단계에 따라 계획 수립, 프로그램 진행, 공간 조성 등으로 지원 분야를 세분화했다. 준비된 주민을 우선 지원하는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주민을 준비시키는 교육과 상담 컨설팅을 병행하면서 ‘을’ 지위에 머물렀던 주민을 ‘슈퍼을’로 격상시키는 등 더욱 성의 있는 지원을 제공하고자 시도하였다.

서울시 마을사업은 주민의 등장과 공동체적 관계의 복원과 형성이라는 성과를 남겨가고 있지만,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과연 시와 구의 마을사업이 정성적으로 정량적으로 현장에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관계망을 어떻게 형성하고 강화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공 재원을 사용하고 행정 담당자를 통해서 실행하는 공공정책이 갖는 한계를 이 사업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 년 단위로 결과를 평가하는 행정시스템은 연속성과 일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적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다. 칸막이 식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행정체계 또한 마을이라는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생태계에 적합하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는 행정동, 법정동과 선거구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주민행정 체계 자체가 주민이나 공동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나 주민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한 동에 2~3만 명이라는 거대한 인구 또한 일상을 공유하는 대면관계에 바탕을 두는 마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직능단체, 관변단체, 시민단체와 맺어 온 갑을관계에 익숙한 행정도 주민이 주도하는 마을사업에 장애로 작동하며 2~3년마다 이루어지는 순환보직도 장애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운동으로서의 마을활동

 

마을활동은 서울시의 마을사업과 깊은 관계는 있지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풀뿌리활동은 마을사업 이전부터 지역에 존재해왔고, 그러던 중 시와 구가 지원하는 마을사업을 만나게 된 것이지, 마을사업이 마을운동이나 풀뿌리활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복잡하고 거대한 도시 서울에서 마을사업은 숱한 난제를 가진 채 진행되고 있고, 사회를 긍정적으로 혹은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려는 주체들에게 마을활동은 좋은 기회이자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을사업과 마을운동은 서울특별시와 25개 자치구를 한국의 중앙이 아닌 지역으로 해석하는 첫 번째 시도이다. 권력과 부의 중앙으로서 서울은 특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지방 소도시나 농어촌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 중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보여준 사람은 예외 없이 서울이라는 큰물로 뛰어 들어왔다. 분야에 상관없이 서울은 인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나 블랙홀처럼 작동한 것이다. 그 결과 수재와 인재라 불리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터전을 떠나 갈고닦은 실력을 큰물인 서울에서 발휘했고, 서울은 그 혜택을 고스란히 입어 온 셈이다. 이는 거꾸로, 인재를 키워낸 출신지나 고향은 그 혜택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 이외에 돈, 권력, 명예 등 여러 부분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지나치게 몰려들어 있다. 이렇듯 서울은 중앙이라는 특성이 뚜렷해서 하나의 지역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웬만한 중규모 도시에 해당하는 현재 25개의 자치구 또한 서울에 속해 있는 기초단체로서 불릴 뿐, 15만~70만 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인식이 매우 낮았다.

마을사업과 마을운동은 서울이라는 광역시와 25개 자치구를 하나의 지역으로 해석하고, 그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역의제 활동이나 일부 단체의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은 서울에서 부차적이랄 것도 없이 아주 부분적인 역할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중앙이라는 큰물에서 활동하는 것이 영역에 관계없이 곧 전국적인 의제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관행이 있었고, 대부분의 단체들은 행정조직이나 기업들처럼 중앙조직 혹은 구심점을 주로 서울에 두어 왔다. 그러던 중 최근 십여 년 동안 ‘전국 범위의 영역운동에서 지역 중심의 종합운동으로’라는 흐름이 강화되어 왔고, 이것은 서울에서 서울지역운동, 혹은 자치구 지역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마을운동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하는 하나의 시도이자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마을운동은 ‘나와 우리’라는 활동 과제와 실천, 성과를 가시적이고 확인 가능한 좁은 범위에서 추진하는 활동이다. 여전히 법제도 개선이나 정책 입안 등 전국 범위의 활동이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는 그런 영역별로 운동을 맡아서 가야 할 것이다. 다만 전국 범위의 활동은 과제 선정, 활동 기획과 실천, 평가 등의 범위가 넓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지역운동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논의와 평가 과정이 매우 추상적이다. 반면에 기초단체 범위의 마을운동이나 풀뿌리활동은 보다 자세한 상황 인식과 과제 선정이 가능하고, 활동의 결과 또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구 40만 명의 도시 규모인 자치구라 해도 입소문과 소통체계를 따라 하루이틀이면 어떤 미디어의 도움 없이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지역에서는 비밀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역이다.

지역운동 혹은 풀뿌리운동이라는 전제 위에서 마을운동은 더 세분화된 과제를 만나게 된다. 마을학교, 마을기업, 마을도서관, 마을미디어, 마을지도, 마을은행, 마을카페 등 다른 마을이나 자치구로 이사를 갈 수 없는, 그 마을 사람들이 만들고 주로 이용하는, 달리 말하자면 그 마을에 고유한 여러 장치와 기제들이 필요하게 된다. 서울시 금천구 어느 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주로 그 학교 학부모와 주민, 학생들이라면, 이 협동조합이 부산광역시 남구로 이사를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기존의 도서관, 은행, 미디어, 단체들이 지역성을 강화하고 공동체 활동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마을의 과제들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을운동은 지역 활동과 관계된 주체나 단체나 기관들에게는 하나의 기회이자 계기이다.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풀뿌리활동을 표방하고 지역에 뿌리내린 단체들이 마을운동에는 더욱 쉽게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직능단체, 관변단체들은 대부분의 구성이 해당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있기도 하다. 주의할 점은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은 공동체 관계를 단절시켜온 이념적 차이, 정치적 당파성, 사회경제적 격차 등 여러 차이를 극복하려는 것인 만큼 직능·관변·시민단체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자치와 풀뿌리민주주의에 힘써오거나 정당운동을 해온 주체들의 경우 마을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직접민주주의와 자치에 대해 갖는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역의제21이 시작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특히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거대정당과 대기업들이 많은 서울 지역에서는 이 작업이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민을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마을활동은 그 자체로 풀뿌리활동이며 주민의 정치 참여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의 확대이다. 이제까지 정당이나 단체들이 의정 모니터와 시정·구정 모니터를 해왔다면 마을활동 방식은 주민들이 그런 일에 직접 나서는 것이다. 그 범위 또한 정책, 예산, 선거 등 참여하는 주민이 관심을 갖는 모든 분야로 확대될 수 있다.

마을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의 담당자들도 과거 단체 실무자나 단체 자원봉사자와는 다른 모양새다. 현재 마을강사, 마을상담원, 마을컨설턴트 등의 마을활동가들 가운데에는 이전에 단체나 지역 활동을 하던 실무자 출신들도 있지만, 적극적인 참여를 하던 주민이 활동가로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민활동가가 단체에서 전업으로 활동했던 실무자 출신과 다른 점은 일상적인 관계와 활동에 강점이 있고, 지속가능한 기반을 보다 탄탄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주민활동가들은 단체 활동가들에 비해 탈이념적이고 탈정치적이며 목적 지향적이라기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

 

 

마을살이와 공동체

 

여느 직장인들은 잠자고 쉬는 집과 일하는 직장이 떨어져 있고 분리되어 있기 마련이다. 주민에게 마을살이는 매우 다양해져서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의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하루 종일의 일상이다. 마을과 마을살이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도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마을활동과 마을사업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전무한 사람부터 높은 관심과 참여를 보이는 주민들까지 폭넓게 존재한다. 아쉽게도 마을활동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어서 전체에 비하면 아직은 극소수의 주민들이 서울에서의 마을살이, 혹은 마을사람으로서의 서울살이를 꿈꾸고 시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마을살이는 말 그대로 공동체 생활이고 다른 마을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관계 맺는 삶 그 자체이다. 마을사람 없이 마을살이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마을사람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망은 마을살이 여부를 알 수 있는 척도라고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마을 밖으로 출근해서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주말에는 골프니 낚시니 여행이니 마을 밖으로 돌아다니는 주민에게 마을사람과의 만남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은 마을 바깥에서 주로 살아가는 것이고, 공동체적 관계가 미약하거나 전무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이나 구청의 마을공동체팀원으로 일하는 담당자가 마을공동체 행정 지원에는 능통하고 전문적일지는 모르나 주거지에서든 생활지에서든 이웃과 소통하고 공동체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마을살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마을은 그저 ‘일’인 것이고, 다른 이들의 마을살이를 돕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이든 의사든 전업주부든 학생이든 단체활동가든 누구나 그렇다. 마을살이는 주민으로서 자신이 그 마을구성원의 일원이고, 다른 구성원과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해나갈 때 시작되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서울에서 마을살이 혹은 공동체적 관계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공동체 관계에 참여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곳에 주민등록을 가지고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거주주민, 또 하나는 그곳에 거주하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보내는 생활주민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곳에 현재는 거주하거나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나 지인관계나 생활경험을 가진 연고주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다른 도시에 사는 연고주민이지만 개미마을의 공동체 행사나 활동에 달려와서 시간과 품을 내서 참여하는 사람은 개미마을에 거주하지만 어떤 공동체 관계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보다 개미마을에서 더 마을살이를 하는 사람이다. 개미마을에서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는 상인이 개미마을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데 치중하고 공동체적 참여와 관계 맺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동네에 가서 장사를 하지만 집에 돌아와 틈틈이 사람들과 소통하고 관계 맺고 마을일에 참여하는 상인이 마을에는 더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을살이를 교육 수준, 소득 수준, 정치적 성향 같은 소위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수준의 지역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마을사람 관계망을 이루어내기가 쉽거나 어려울 수 있을까? 특정 정치 성향이 뚜렷한 곳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쉽게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할까? 일반적으로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나의 마을살이

 

필자 스스로 ‘나는 마을, 공동체적 관계망, 마을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를 짚어보는 것으로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나는 내가 거주하거나 혹은 생활하는 곳에서 일상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마을사람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일이나 목적이나 활동이나 사업이나 취미나 기호나 이념 등등 내가 선호하는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들, 소위 말해서 내가 좋아하고 편한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가 살거나 일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보고,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서로를 즐겁게 떠나보낼 수 있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혹시 필요하면 언제라도 지금 살고 있는 곳, 일하는 곳을 훌쩍 떠날 수 있도록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윗집 아랫집 옆집 사람들과 마을살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를 믿고 기대고 지지하고, 내가 믿고 기대고 지지할 수 있는 그런 마을사람 관계를 내가 혹시 자발적으로 저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지금 더 힘든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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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마을공동체로부터 온 편지 (김종남, 2014)

조회수:92
2015-02-10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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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심과 살림』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마을공동체로부터 온 편지

 

글 김종남  (여성주의 풀뿌리활동을 해오다 2014년 초 자발적 백수를 선택해 사회적경제 교육 및 컨설팅 등 마을과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자유롭게 하고 있음.)

 

 

 

 

21세기 서울에서 마을을?

 

영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어렸을 적에는 21세기가 오면 영화에서처럼 뭔가 놀라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천 불 소득 백억 불 수출’이라는 구호가 실현될 1980년을 어린 생각에 마음 설레며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시점들이 과거로 변하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바뀌었으나 꿈같은 세상이 오지는 않은 것 같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산업화와 경제적 부가, 문화적인 진보와 다양성이, 대도시의 번창 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것은 틀림없으나, 그 혜택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갈 뿐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전히 불만과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21세기 대도시 서울에서 전혀 미래지향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과거지향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마을’이 화두로 등장했다. 한국 최대의 도시에서 마을공동체는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마을이 나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마을이 보통명사이고 다양하게 쓰이는 용어이므로, 이 글에서 마을은 ‘공동체적 관계망’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의미가 강한 ‘동네’와 달리, ‘마을’은 일정한 공간과 경험과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다시 말해 이웃사람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마을사람 없이 텅 빈 동네는 있을 수 있지만, 이웃사람 없이 마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마을공동체’라는 말은 기존의 ‘마을만들기’라는 정부정책 혹은 일단의 민간 활동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므로, 이 글에서 마을은 곧 공동체를 의미한다. 마을공동체라는 용어는 필요해서 생겨났을 뿐 동어반복에 가깝다.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서울에서 마실 나가는 범위였던 마을은 훨씬 넓어졌고, 매우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과거와 달리 강한 개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공동체라는 점도 추억 속 마을과 전혀 다른 특징이다.

 

 

서울살이

 

서울살이 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값은 필요와 기능에 따른 이해관계이다. 자본과 권력, 인기와 명예, 욕망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밀도로 몰려 있는 도시 서울에서 일상과 활동과 사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 정이 오가는 공동체적 관계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하면 전화, 문자메시지, SNS를 통해서 상대방을 찾아 먼저 연락하고, 급하면 직접 만나러 달려가곤 한다. 하지만 내게 필요 없으면 가족과 친척이든 오랜 친구든 옛 동료든 일이 년, 아니 십 년 동안 전화 한 번 하지 않게 된다. 멀리 있는 사람뿐 아니라, 바로 옆집 앞집 사람들조차 만날 필요나 기회가 없으면 몇 년쯤 모른 채 살아가도 별로 불편할 것이 없는 생활이 서울살이의 기본값이다.

서울살이의 인간관계에서 필요와 기능에 따른 이해관계가 정서적 공감과 연대에 기초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압도하고 있다. 빠른 산업화 도시화 과정의 이면에서 공동체적 관계는 훼손되고 축소되어 왔다. 군중 속의 고독으로 상징되는 익명성이 확산되고, 대면관계에 비해 비대면관계가 훨씬 넓게 그리고 자주 발생하고,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소외시키는 비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확장되어, 결국 관계마저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비인간적인 가치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져 왔다. 서울살이는 지난 삼십여 년 유행처럼 떠돌고 있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가치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꽤 우울한 것이었다. 국가는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에 진입하고 서울은 그 중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성장하였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감은 더 낮아져서, 청소년과 노년층의 높은 자살률, 비정규직과 고용불안계층의 증가, 높은 부동산 비용으로 인한 주거불안, 치솟는 사교육비로 인한 가계 부담, 이웃 간 소음과 주차 문제로 인한 극단적인 사고 등 서울 시민에게 삶의 질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현상들은 통계나 사건들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객관적인 수준의 문제들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 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서울은 일부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비생태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개조되어 왔다. 하루 아니 일주일 내내 흙을 밟아볼 기회를 가져보기 힘들 정도로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어, 일부러 산이나 공원에 가서야 잠깐이나마 흙을 밟아볼 수 있다. 위생과 치수, 편리함을 위해 서울 대부분의 공간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시멘트 바닥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온갖 살충제를 가로수와 골목골목에 뿌려대고 있어 벌레나 곤충 또한 살 수 없고, 그래서 먹이가 부족해진 새들은 서울을 떠나간 지 오래이다.

 

 

서울의 마을살이

 

동네와 골목으로 눈을 돌려 마을살이를 살펴보면 더 심각한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서울의 마을들은 자족 기능을 상실한 채 잠깐 쉬고 잠을 자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출산, 육아, 교육, 놀이, 일, 축제, 장례 등 과거에는 집안과 마을에서 해결되었던 대부분의 영역들이 어느새 상품으로 변해 가격을 지불해야 구할 수 있게 됐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산부인과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고, 평생을 지불하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도 장례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 또 지불해야 한다. 마을에서 산파 역할을 하는 이웃의 도움으로 출산하고, 마당에서 마을장을 치르며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일들이다. 육아와 교육도 그러하다. 예전처럼 육아와 교육의 대부분을 집안이나 마을에서 해내기는 힘들다 해도, 공동체적 관계가 있으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시 보육, 아동 보호, 자녀 교육의 대부분이 대가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학원,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몫으로 되어버렸다. 놀이문화는 고도로 상업화의 길을 걸었다. 테마파크, 수영장, 극장, 스키장 등 짜릿한 놀이가 가능한 곳들은 높은 가격을 받는 상품이라는 점과 마을에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직장과 일터도 그렇다. 마을에는 돈이 없고 마땅한 일자리가 부족해서 돈을 벌려면 한두 시간 이동해서 벌어 와야 한다. 마을에서 버티고 있는 골목경제 주체인 자영업자들은 이제 몇 가지 아이템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구멍가게와 잡화점은 대자본의 편의점에 점령당했고, 채소가게 과일가게 옷가게 전통시장 등은 대형할인매장과 백화점 그리고 인터넷 쇼핑몰에 점점 밀리며 일부만 살아남아 있다. 이런 자영업자들의 생존율은 비참한 수준이어서, 서울의 경우 자영업자의 5년 생존율이 30% 수준이고, 그 중 절반을 차지하는 음식업종의 생존율은 20% 미만이다. 서울의 마을들은 자족 기능을 상실하였고, 마을에서는 일도 놀이도 교육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마을은 재미없고 후진 곳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은 서울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도시 근교의 한갓진 동네를 가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여서, 지난해에 마을 강의를 하러 가본 경기도 오산시 서랑동도 이러했다. 전통적인 자연부락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서랑마을은 수십 호로 이루어진 아담한 동네였는데, 이 동네에서는 그 흔한 과자 한 봉지를 살 수가 없었다. 가게라고는 길가에 남아있는 식당이 유일했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장을 보러 영화를 보러 병을 치료하러 장례를 치르러 오산시나 수원시까지 나다니고 있었다.

과거에 비해 개인 소득이 스무 배 이상 늘어나고, 물질적으로는 더 이상 풍요로울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데 우리는 왜 늘 허전하고 아쉽고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의 일부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공동체적 관계망이라는 마을 범위 안에서 무료로 또는 품앗이 방식으로 해결되던 많은 과제들이, 이제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이는 화폐로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와 달리 너무 많은 물품과 서비스를 구입해야 서울살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집안과 마을에 머무르지 않고 다 새어 나가는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 SSM, 편의점, 주유소, 통신사 등등 집안과 마을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거액의 순이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장치가 있는 한, 달리 말해 가격을 지불하도록 사실상 강제하는 장치가 곳곳에 있는 한 마을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마을이 풍요로워지려면 화폐로 표현되는 가치를 벌어들이는 것보다는 가급적 돈이 새어 나가지 않고 마을 안에서 돌 수 있도록 골목경제와 마을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방법이 필요하다. 마을사람들을 찾아서, 즉 공동체적 관계망을 복원해서, 상조회사와 보험회사에 회비를 낼 것이 아니라 마을 상조회를 만들어 내고, 학원에 사교육비를 낼 것이 아니라 교육협동조합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고, 테마파크와 TV를 통하지 아니하고 아이들끼리 할 수 있는 놀이를 제공하고, 정체불명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김치를 사먹을 것이 아니라 서너 집이 모여 일 년에 두세 번 김치를 담아서 나눠 먹는 방법이다.

서울 마을살이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동과 청소년, 청년들은 대학입시와 스펙 쌓기에 내몰리며 마을을 떠나 어딘가에서 더 훌륭하고 큰 뜻을 품고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다. 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집단은 다름 아니라 그 부모세대이다. 웬만한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가난하고 낙후된 마을에서 성장해서 살아가기보다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학력과 스펙을 쌓아 번듯하고 안정된 삶을 ‘마을 바깥 어딘가’에서 해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힘없고 보잘 것 없는 마을사람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보다는 부나 권력, 인기나 명예를 얻거나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해관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에게 또 옆집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면서 ‘나처럼 살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동네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어 할까? 혹시 우리 스스로 자신과 자녀와 동네 아이들과 다른 주민들에게 경쟁·성공·효율·생산성의 잣대를 수시로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마을사업 혹은 마을운동이 옛것을 존중하고 전통을 되살리자는 복고적인 지향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마을운동에는 품앗이, 두레, 계 등 예전의 공동체적 방식과 가치를 회복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지만, 개인주의가 일반화돼 있다는 점, 교통·통신이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등 환경적인 여건이 매우 다르다는 점 또한 반영되어 있다.

 

 

공공정책으로서의 마을사업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는 전국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안행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의 철학과 지향은 지난해 발표한 아래 보도자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앞으로 안행부는 새 정부 국정과제인 국민통합과 새마을운동 정신 계승을 위해 주민이 이끌어가는 선진형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사회 약자·소외계층과 함께 나눔의 이웃공동체를 실천해 나가고, 활기차고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지역공동체 활성화 방안 수립, 전문가 그룹 구성·운영, 표준조례 제정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2013.4.22. 안전행정부 보도자료 중)

 

전국의 모든 자치단체의 마을만들기가 안행부와 똑같지는 않겠으나 기본적으로 ‘마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조는 중앙 부처든 자치단체든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에 나타난 새마을운동이나 새마을운동 정신 계승이 문제될 것은 없다. 마을만들기 정책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성과는 ‘만들기’라는 방식 자체가 갖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골목길과 주택을 정비하고 마을회관과 마을도서관과 마을카페를 만들어서 ‘활기차고 살기 좋은’ 동네로 변모시키면 마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아쉽게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마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하드웨어가 개선되어 겉으로 볼 수 있는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나 전문가가 아무리 주민들에게 예산 지원과 콘텐츠를 제시한들 마을사람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만들어지고 그 관계망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마을사람으로 변해나가는 과정이 없다면 여전히 마을은 없는 것이다. 공동체적 관계를 가진 마을사람은 없고 주민등록이나 사업자등록을 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마을의 주인인 주민들이 훼손되고 사라져 가는 공동체적 관계망을 복원하여, 정부 지원의 대상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그런 지원과 도움을 활용하여 주인으로서의 자기 위치와 역할을 복원할 때 마을은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정서적 유대와 신뢰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마을사람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다양한 이유로 수없이 끊어지고 파괴되어 왔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 분양아파트 세대와 임대아파트 세대 간의 갈등을 보자.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임대아파트 주민이 출입을 못하도록 철조망을 두르거나 어린이놀이터 사용을 금지하는 모습은 이웃 사이에서 공동체적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갈등이 있는 아파트에서 함께 텃밭을 일구어 재배한 채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마을음악회를 하면서 소통을 시작해서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관계를 복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일이 년이 아니라 수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수십 가지 계기가 필요하다. 이때 마을음악회와 아파트 텃밭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주민들이 마을사람이고 이웃이라는 관계를 복원하거나 형성하는 과정이자 수단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전마을, 문화마을, 예술마을, 복지마을, 벽화마을 등등 마을에 주제를 입혀서 마을만들기를 해 나가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에서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테마가 있는 마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의 주인인 주민을 지원하여 주민 스스로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거나 강화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은 행정이 주도하는 하향식의 마을만들기 방식을 경계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상향식 사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이나 과거의 마을만들기 사업에 비해 진일보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서울시 마을사업은 주민의 등장을 촉진하고, 주민 스스로 마을을 조사하고 계획하고 사업을 하면서 공동체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확장하고 강화하도록 했고, 공동체적 관계망의 단계에 따라 계획 수립, 프로그램 진행, 공간 조성 등으로 지원 분야를 세분화했다. 준비된 주민을 우선 지원하는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주민을 준비시키는 교육과 상담 컨설팅을 병행하면서 ‘을’ 지위에 머물렀던 주민을 ‘슈퍼을’로 격상시키는 등 더욱 성의 있는 지원을 제공하고자 시도하였다.

서울시 마을사업은 주민의 등장과 공동체적 관계의 복원과 형성이라는 성과를 남겨가고 있지만,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과연 시와 구의 마을사업이 정성적으로 정량적으로 현장에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관계망을 어떻게 형성하고 강화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공 재원을 사용하고 행정 담당자를 통해서 실행하는 공공정책이 갖는 한계를 이 사업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 년 단위로 결과를 평가하는 행정시스템은 연속성과 일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적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다. 칸막이 식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행정체계 또한 마을이라는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생태계에 적합하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는 행정동, 법정동과 선거구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주민행정 체계 자체가 주민이나 공동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나 주민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한 동에 2~3만 명이라는 거대한 인구 또한 일상을 공유하는 대면관계에 바탕을 두는 마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직능단체, 관변단체, 시민단체와 맺어 온 갑을관계에 익숙한 행정도 주민이 주도하는 마을사업에 장애로 작동하며 2~3년마다 이루어지는 순환보직도 장애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운동으로서의 마을활동

 

마을활동은 서울시의 마을사업과 깊은 관계는 있지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풀뿌리활동은 마을사업 이전부터 지역에 존재해왔고, 그러던 중 시와 구가 지원하는 마을사업을 만나게 된 것이지, 마을사업이 마을운동이나 풀뿌리활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복잡하고 거대한 도시 서울에서 마을사업은 숱한 난제를 가진 채 진행되고 있고, 사회를 긍정적으로 혹은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려는 주체들에게 마을활동은 좋은 기회이자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을사업과 마을운동은 서울특별시와 25개 자치구를 한국의 중앙이 아닌 지역으로 해석하는 첫 번째 시도이다. 권력과 부의 중앙으로서 서울은 특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지방 소도시나 농어촌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 중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보여준 사람은 예외 없이 서울이라는 큰물로 뛰어 들어왔다. 분야에 상관없이 서울은 인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나 블랙홀처럼 작동한 것이다. 그 결과 수재와 인재라 불리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터전을 떠나 갈고닦은 실력을 큰물인 서울에서 발휘했고, 서울은 그 혜택을 고스란히 입어 온 셈이다. 이는 거꾸로, 인재를 키워낸 출신지나 고향은 그 혜택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 이외에 돈, 권력, 명예 등 여러 부분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지나치게 몰려들어 있다. 이렇듯 서울은 중앙이라는 특성이 뚜렷해서 하나의 지역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웬만한 중규모 도시에 해당하는 현재 25개의 자치구 또한 서울에 속해 있는 기초단체로서 불릴 뿐, 15만~70만 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인식이 매우 낮았다.

마을사업과 마을운동은 서울이라는 광역시와 25개 자치구를 하나의 지역으로 해석하고, 그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역의제 활동이나 일부 단체의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은 서울에서 부차적이랄 것도 없이 아주 부분적인 역할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중앙이라는 큰물에서 활동하는 것이 영역에 관계없이 곧 전국적인 의제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관행이 있었고, 대부분의 단체들은 행정조직이나 기업들처럼 중앙조직 혹은 구심점을 주로 서울에 두어 왔다. 그러던 중 최근 십여 년 동안 ‘전국 범위의 영역운동에서 지역 중심의 종합운동으로’라는 흐름이 강화되어 왔고, 이것은 서울에서 서울지역운동, 혹은 자치구 지역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마을운동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하는 하나의 시도이자 흐름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마을운동은 ‘나와 우리’라는 활동 과제와 실천, 성과를 가시적이고 확인 가능한 좁은 범위에서 추진하는 활동이다. 여전히 법제도 개선이나 정책 입안 등 전국 범위의 활동이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는 그런 영역별로 운동을 맡아서 가야 할 것이다. 다만 전국 범위의 활동은 과제 선정, 활동 기획과 실천, 평가 등의 범위가 넓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지역운동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논의와 평가 과정이 매우 추상적이다. 반면에 기초단체 범위의 마을운동이나 풀뿌리활동은 보다 자세한 상황 인식과 과제 선정이 가능하고, 활동의 결과 또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구 40만 명의 도시 규모인 자치구라 해도 입소문과 소통체계를 따라 하루이틀이면 어떤 미디어의 도움 없이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지역에서는 비밀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역이다.

지역운동 혹은 풀뿌리운동이라는 전제 위에서 마을운동은 더 세분화된 과제를 만나게 된다. 마을학교, 마을기업, 마을도서관, 마을미디어, 마을지도, 마을은행, 마을카페 등 다른 마을이나 자치구로 이사를 갈 수 없는, 그 마을 사람들이 만들고 주로 이용하는, 달리 말하자면 그 마을에 고유한 여러 장치와 기제들이 필요하게 된다. 서울시 금천구 어느 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주로 그 학교 학부모와 주민, 학생들이라면, 이 협동조합이 부산광역시 남구로 이사를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기존의 도서관, 은행, 미디어, 단체들이 지역성을 강화하고 공동체 활동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마을의 과제들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을운동은 지역 활동과 관계된 주체나 단체나 기관들에게는 하나의 기회이자 계기이다.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풀뿌리활동을 표방하고 지역에 뿌리내린 단체들이 마을운동에는 더욱 쉽게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직능단체, 관변단체들은 대부분의 구성이 해당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있기도 하다. 주의할 점은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은 공동체 관계를 단절시켜온 이념적 차이, 정치적 당파성, 사회경제적 격차 등 여러 차이를 극복하려는 것인 만큼 직능·관변·시민단체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자치와 풀뿌리민주주의에 힘써오거나 정당운동을 해온 주체들의 경우 마을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직접민주주의와 자치에 대해 갖는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역의제21이 시작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특히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거대정당과 대기업들이 많은 서울 지역에서는 이 작업이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민을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마을활동은 그 자체로 풀뿌리활동이며 주민의 정치 참여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의 확대이다. 이제까지 정당이나 단체들이 의정 모니터와 시정·구정 모니터를 해왔다면 마을활동 방식은 주민들이 그런 일에 직접 나서는 것이다. 그 범위 또한 정책, 예산, 선거 등 참여하는 주민이 관심을 갖는 모든 분야로 확대될 수 있다.

마을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의 담당자들도 과거 단체 실무자나 단체 자원봉사자와는 다른 모양새다. 현재 마을강사, 마을상담원, 마을컨설턴트 등의 마을활동가들 가운데에는 이전에 단체나 지역 활동을 하던 실무자 출신들도 있지만, 적극적인 참여를 하던 주민이 활동가로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민활동가가 단체에서 전업으로 활동했던 실무자 출신과 다른 점은 일상적인 관계와 활동에 강점이 있고, 지속가능한 기반을 보다 탄탄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주민활동가들은 단체 활동가들에 비해 탈이념적이고 탈정치적이며 목적 지향적이라기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

 

 

마을살이와 공동체

 

여느 직장인들은 잠자고 쉬는 집과 일하는 직장이 떨어져 있고 분리되어 있기 마련이다. 주민에게 마을살이는 매우 다양해져서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의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하루 종일의 일상이다. 마을과 마을살이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도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마을활동과 마을사업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전무한 사람부터 높은 관심과 참여를 보이는 주민들까지 폭넓게 존재한다. 아쉽게도 마을활동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어서 전체에 비하면 아직은 극소수의 주민들이 서울에서의 마을살이, 혹은 마을사람으로서의 서울살이를 꿈꾸고 시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마을살이는 말 그대로 공동체 생활이고 다른 마을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관계 맺는 삶 그 자체이다. 마을사람 없이 마을살이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마을사람들과의 공동체적 관계망은 마을살이 여부를 알 수 있는 척도라고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마을 밖으로 출근해서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주말에는 골프니 낚시니 여행이니 마을 밖으로 돌아다니는 주민에게 마을사람과의 만남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은 마을 바깥에서 주로 살아가는 것이고, 공동체적 관계가 미약하거나 전무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이나 구청의 마을공동체팀원으로 일하는 담당자가 마을공동체 행정 지원에는 능통하고 전문적일지는 모르나 주거지에서든 생활지에서든 이웃과 소통하고 공동체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마을살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마을은 그저 ‘일’인 것이고, 다른 이들의 마을살이를 돕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이든 의사든 전업주부든 학생이든 단체활동가든 누구나 그렇다. 마을살이는 주민으로서 자신이 그 마을구성원의 일원이고, 다른 구성원과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해나갈 때 시작되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서울에서 마을살이 혹은 공동체적 관계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공동체 관계에 참여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곳에 주민등록을 가지고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거주주민, 또 하나는 그곳에 거주하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보내는 생활주민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곳에 현재는 거주하거나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나 지인관계나 생활경험을 가진 연고주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다른 도시에 사는 연고주민이지만 개미마을의 공동체 행사나 활동에 달려와서 시간과 품을 내서 참여하는 사람은 개미마을에 거주하지만 어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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