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림왕 임종국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01-28 20:19:02    조회 : 489회    댓글: 0

 

 

조림왕 임종국(林種國)

숲 사이로 스며드는 여명은 희망의 빛이다. 우리 민족의 여명은 숲이다.

조림왕 임종국 선생의 혼은 숲속에 여명으로 깃들어 있다.

그는 죽어서도 그 산을, 그 숲을 떠나지 않았다.

그 유골을 수목장으로 묻어 그 숲에 바쳤다.

그의 혼을 바쳐 가꾼 영혼의 숲이 바로 장성 축령산 편백림과 삼나무 숲이다.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15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임영규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창중학교 3년 중퇴 후 농촌 일을 돕다가 25세 때인 1940년 전남 장성군 장재 마을로 이주, 양잠과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제법 짭짤한 농가소득을 올려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그는 농사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돈도 벌면서 영농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우연히 장성군 덕진리의 인촌 김성수 선생 소유 야산에 쭉쭉 뻗어 자라고 있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보고 ‘아! 우리 강산에도 이런 나무가 성장할 수 있구나’를 느끼며 한눈에 반해버렸다. 6.25전쟁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그 해 봄부터 본격 조림을 시작했다.

일단 사재를 털어 자기소유 임야 1㏊에 삼나무 5,000주를 시험 조성하여 성공하자, 용기와 자신감을 더욱 얻게 되었다. 알맞은 땅에 알맞은 나무를 골라 심는 임종국 선생은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서삼면 모암리, 북하면 월성리 일대 등 100㏊를 추가 매입하고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어나갔다.

먹을거리도 제대로 없던 시절 조림사업에 대단위 조림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감행하였다. 이곳을 본 주위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68년엔 전국에 몰아닥친 극심한 가뭄으로 밭작물뿐만 아니라 그가 조림한 나무들이 전부 말라죽을 위기에 처했다. 하나둘씩 말라비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다. 그의 어깨는 피투성이였다. 그의 정성에 감복한 나무들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해를 거듭할수록 조림면적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의 조림사업은 76년까지 계속됐다. 꼬박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가꾼 것이다. 72년 그가 5·16 민족상을 받을 때 71년까지 그의 투자비용은 총 7,370만원으로 평가돼 있다. 10년 자란 나무 한그루가 1,000원 하던 시절이니 엄청난 투자를 한 셈이다.

그의 조림사업은 가뭄·수해·돈 문제 등으로 몇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우직할 정도의 끈기와 검소한 생활로 잘 넘어갔다. 그러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그 소유의 산과 임야들은 그가 돈을 끌어다 쓴 사채업자와 채권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가 79년 말 상황이고, 80년엔 임종국 선생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임종국 선생은 7년간을 투병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한국의 조림왕’은 그렇게 쓸쓸히 간 것이다. 장남 임씨가 전하는 그의 유언은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게 나라사랑하는 길이다.” 역시 조림왕 다운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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