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 전헌호 신부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04-07 13:39:26    조회 : 497회    댓글: 0


[부활 특별기고] 전헌호 신부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풍요와 편리함이 가져온 ‘쓰레기강산’
소비보다 청빈한 삶에서 행복찾아야

오스트리아 아드몬트 수도원 주변
사과껍질 하나라도 제대로 분리 못하면
막대한 벌금 부과… 깨끗한 산과 들 지켜
하느님께서 주신 한계 인정하며 통찰해야


발행일 : 2015-04-05 [제2938호, 15면]

  
현대 사회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은 인간 삶에 편리함과 윤택함을 가져다줬지만, 자연환경 훼손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됐다. 이러한 환경파괴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창조질서 측면에서 꾸준히 우려를 표명해왔고,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팔십 주년」 등 가르침을 통해 인간 생존마저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생태신학을 연구해온 전헌호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인간과영성연구소 소장) 특별기고를 통해 생태계 안에 있는 하느님 법칙을 알아보고, 그 안에서 영원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성적 요소를 묵상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삶은 단 일회적이고 매우 소중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이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와 너, 사람의 목숨과 그 목숨의 연장인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성한 숲속의 각종 나무들과 풀들, 새들과 동물들을 좋아하고 집에서 기르는 바둑이가 강아지를 낳았다든지 할 때 매우 기뻐한다. 사람의 출생에 대해서는 더욱 더 기뻐한다.

나무와 풀들도 땅에 뿌리를 박고 자랄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면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비, 바람, 햇볕 등 주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뿌리를 뻗어 내린다.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종족 번식을 위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만 개 씨앗을 해마다 주변 환경에 내려놓는다. 각종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번식을 위해 노력한다. 남극 대륙에서 알을 낳아 새끼를 키워가는 황제펭귄은 영하 60℃의 추위 속에서도 종족번식을 위해 암수가 교대로 최선을 다해 나간다.

우리는 삶을 유지, 발전시키고 후손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다. 막대한 힘을 가진 자연환경을 극복하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하면서 이 땅 위에 생존해 왔다. 기술문명과 제도들을 발전시켜온 덕분에 지난 20세기에 들면서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더 많은 희망을 가졌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매우 당혹해 하고 있다.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하며 합리적인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터전인 주변 환경이 온통 병들어 있고 총체적인 위기 속에 있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분석과 통계수치가 알려주는 대로 우리는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긴 버스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처지에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오스트리아 아드몬트(Admont)수도원 주변과 오스트리아 전체의 환경을 볼 때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의 땅에 인구 800만 명이 환경을 생각하는 매우 절제되고 엄격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가까운 미래에 어떤 총체적인 파국을 맞을 위험을 염려하지 않는다. 이들은 외국과의 교역 없이도 자급자족할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고, 쓰레기 분리수거에 있어서도 사과껍질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막대한 벌금을 내는 부담을 모두 기꺼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산천이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깨끗하다.

이들은 금세기 초나 지금이나 거의 같은 수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고, 산과 들에 자라는 숲, 초지, 경작지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환경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개화되어, 폐지나 폐비닐 한 조각도 어김없이 분리수거하여 재활용 해나간다. 풍요 속에서 지켜나가는 엄격한 절제의 생활태도는 청정한 자연환경, 지속가능한 삶, 불안이 엄습하지 않는 평화의 삶으로 보상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문제로 인류 전체에 큰 파국이 온다면 이들에게도 안전과 풍요를 계속 유지할 보장은 없다. 고통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사람들이 몰려 들 것이고, 이것에 의해 야기될 문제는 상당히 클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쪽 보스니아에서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은 아직도 이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

환경문제는 이웃나라를 고려하지 않고 쉽게 넘어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염된 공기, 물 등은 인위적으로 그어 놓은 국경을 감안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환경을 감안하면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상당히 큰 우려가 엄습해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난관들은 너무 가혹한 것으로 생각되기조차 한다. 소중한 생명들을 애써 키워왔는데, 과밀한 인구밀도 문제가 심각해졌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수출을 많이 해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애를 써왔는데 금수강산이 쓰레기강산이 되고 있다. 전혀 원하지 않은 일이다.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한 삶, 좀 더 많은 후손들이 오손도손 잘 살아가는 삶을 추구한 것이지 우리의 생태계가 지탱하기 힘든 인구밀도, 환경오염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뜻하지 않게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배고픔과 높은 유아사망률, 질병 등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자나 깨나 노심초사했던 그 노력과 열정으로 애를 써야 함을 느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하기에 좀 더 풍성한 삶을 추구하는 노력과 함께, 하느님께서 한계도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정해 주신 한계선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삶의 공간과 조건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지구와 그 위의 생태계라는 것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른 탈출구는 없다. 지구환경을 벗어나서도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가톨릭교회와 불교 등 대부분의 고등종교들의 오랜 전통이 전해주는 청빈에 대한 영성을 좀 더 깊이 통찰하는 것이 우리를 총체적인 파국으로부터 구출해 줄 수 있는 길이다.

오늘날의 환경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에로 관심과 힘을 기울이도록 압박하고 있다. 좀 더 긴 수명과 좀 더 많은 물질적 소비에서 행복을 찾는 것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성을 과감히 인정하여 청빈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루하루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삶을 전체적으로 관조하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참된 모습을 알아내는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새로운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좀 더 강하게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현세에 주어진 제한성을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내적 자세를 가질 때 오늘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삶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고, 그 삶에 뼈아픈 제한성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발적으로 인정하여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질서를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순종이 강요되는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청빈과 풍요한 정신적 삶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함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90년 1월 1일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발표하신 ‘평화를 위한 제언들’에 큰 영향을 받은 ‘1992년 리우 유엔 환경선언문’은 지속가능한 개발에 초점이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바로 이러한 절제된 자세, 물질적 소비보다는 청빈과 진실을 추구할 때 쌓이는 정신적 풍요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물쭈물해서는 안 되는 상태에 있다. 너 나 없이 이미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정책을 비롯해서 국민 대다수의 삶의 방식은 이러한 난관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도 더욱더 파국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편으로 우리의 내면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생명에 대한 통찰은 이렇게 계속가면 안 된다는 신호를 점점 더 강하게 보내오고 있다. 살고자하는 강한 의지는 우리를 결국에는 삶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줄 것이다. 아니 이미 알려주고 있다. 필자가 제한된 이 지면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내면의 소리를 통해 이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실천만이 우리를 참으로 살려 낼 것이다.

 


가톨릭대학교를 졸업, 오스트리아 빈(Wien)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7월 5일 사제품을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 교수, 인간과영성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전헌호 신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