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받으소서 6장 해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5-03 17:30:56    조회 : 364회    댓글: 0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1.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① 새로운 생활양식과 교육

 

“어떤 물건을 즉시 버리기보다는 재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뜻을 갖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일 수 있습니다”(211항).

 

지난 2세기에 걸쳐 인류는 지배자이며 주인인 양 우리의 공동 가정을 마음껏 착취하여 황폐화시켰다. 그 무모함은 인류를 마침내 십자로에까지 데려왔다(102항). 그 십자로에는 경로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없고, 인류에게는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 없다. 우리는 이정표를 마련하고 나침반을 찾기 위해서 일단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태도 자체를 재조사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기초적 자각”의 회복이며 “문화적이고 영적이며 교육적인 거대한 도전”이라고 한다(202항).

 

환경의 타락은 우리에게 생활양식을 재조사하라는 과제를 안겨 준다(206항). 교종은 그 한 사례로 “과학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쫓는 소비주의”를 꼽는다. 소비주의가 낳는 것은 “경제·금융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극소수”의 거짓 자유와 대다수의 자유 박탈과 정체성 상실이다(203항). 이는 “집단적 이기심”을 불러오고 “탐욕”을 키움으로써 더 많은 구매와 소유와 소비를 갈망하게 만든다. 이 집착적 소비주의 생활양식에서는 “공동선에 대한 참된 의식”을 찾아볼 수 없고 “사회 규범조차도 개인적 욕구들과 충돌하지 않는 한도까지만”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불안”과 “폭력과 상호 파멸”을 야기한다(204항). 회칙은 이런 소비주의를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이라고 한다(208항).

 

우리는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극복하고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된 진선미를 향한 개방성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 우리는 선한 것을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다(205항). 이 생활양식의 변화는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압력이 될 수 있다. 그 예로 교종은 ‘특정 상품 불매 운동’이 기업의 생산 방식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소개하면서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소비 생활의 도덕성 회복을 강조한다(206항). 이렇게 우리는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들을 일으킬 수 있다”(208항).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새로운 습관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관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서 교육 차원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209항 참조). 교종은 ‘생태 시민 의식’(211항)을 고취하려는 환경 관련 교육이 그 목표를 넓혀 왔음을 주목한다. “과학적 정보 제공과 의식 고취와 환경 재앙 방지”에 중점을 두었던 교육이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근대정신의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 영역을 확장했으며, “다양한 수준의 생태적 평형 상태 회복”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고 환영한다. 그러면서도 교종은 생태 윤리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그 ‘초월자’를 향한 도약을 촉진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며, 그 생태 윤리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210항).

 

법과 규제만으로는 “나쁜 행실의 경로”를 바꾸는 데에 충분치 않다. ‘생태 시민 의식’을 갖고 좋은 습관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심 없이 생태의 삶에 투신할 수 있으려면”, 훌륭한 덕을 계발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교종은 ‘환경에 대한 책임 교육’이라고 부른다. 이 교육은 “더 많이 지출하고 소비할 수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난방을 덜 하고 대신 따뜻한 옷을 입는” 습관처럼,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을 장려할 수 있다. 이런 좋은 습관(덕행)은 고상하고, ‘창의력’을 드러내며,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이다(211항). 그런 행동들은 세상에 ‘미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며, 지상의 삶이 값지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212항).

 

우리 자신을 성찰한다. 우리는 교육 영역을 포함하여 사회 각 영역에서,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생활양식 대신에, 자기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 우리의 왜곡된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생활양식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 땅의 종교가 지나치게 이기적이며 기복적인 성향, 곧 개인주의 신앙에로 퇴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개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교회에는 ‘생태 윤리’를 개발할 역량을 갖춘 교육자들은 있는가? 교회는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의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더 많은 지출과 소비를 과시하는 양적 팽창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생태의 윤리’ 교사인가? [평화신문, 2016년 2월 2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2.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② 그리스도교 영성 - 생태의 전환

 

 

“생태 재앙은 철저한 ‘내적 전환에의 소환장’이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생태의 전환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난 결과들은 자기 주변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이루신 업적의 보호자들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인 생활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217항).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의 재앙’(제1장)은 근현대의 ‘소비주의 패러다임’이 낳은 치명과 자멸과 공멸의 중병(重病)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은 “문화·영(정신)·교육적인”(202항) 거대한 전환이다. 회칙은 이를 ‘생태의 전환’이라고 부르며, 그 전환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교의 ‘생태의 영성’을 그리스도인에게 제안한다(216항 이하). 그리스도교의 건전한 영성은 ‘생태의 전환’을 가져오며, 그 전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결과들은 자기 주변과 맺는 관계(문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17항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3항)

 

회칙은 ‘생태의 전환’으로 두 차원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람들의 ‘인격적 차원의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의 ‘공동체 차원의 전환’이다. “삼라만상과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전환’은 “우리의 잘못, 죄, 실수와 실패에 대한 인정”과 함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와 변화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218항 참조). 그럼에도 “오늘날 세상이 직면한 그 엄청나게 복잡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주도성” 곧 ‘인격적 차원의 전환’뿐만 아니라, “공동체 관계망들”로 대처해야만 하므로 ‘공동체 차원의 전환’이 반드시 요구된다(219항 참조). 교회의 사회교리에서는 전자를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애덕’으로, 후자를 ‘정치 사회적 차원의 애덕’으로 설명한다.

 

‘생태의 전환’을 도모하려면, 인격적이든 공동체적이든, ‘관대한 돌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회칙은 그 정신을 키우기 위한 네 가지 태도를 제시한다. 첫째, 감사와 무상의 호의라는 태도다. 이는 세상이 하느님의 무상의 호의에 따른 선물이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사랑하는 자각이라는 태도다. 이는 우리가 다른 창조물과 우주적 친교로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셋째, 하느님께서 주신 각각의 역량을 개발하는 태도다. 이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보다 더 위대한 창의력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를 말한다. 넷째,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태도다. 이는 인간의 우월성을 지배가 아니라 책임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220항 참조).

 

교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신 안에는 분명히 ‘생태 전환의 차원’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각각의 창조물은 하느님의 무엇인가를 반영하며 우리에게 전할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자각’에 대한 확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물질적 세계에 가져다주신” ‘안정’에 대한 확신, “우리 인간에게는 무시할 권리가 없는 하느님의 질서와 활력이 이 세상에 새겨져 있다”는 ‘인정’에 대한 확신이 바로 그 ‘전환의 차원’이다(221항 참조). 그리고 교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전환의 차원을 인정하고 충분히 살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창조물과 맺은 우리의 관계, 우리 주변 세상과 맺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 인류의 “숭고한 형제 관계”를 키우는 데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회칙을 가르침을 빌어서,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에게 주신 그 영적 보화들 안에서 (건전한 영성에서) 정신의 생활은(the life of the spirit) 육체나 자연이나 세상의 실재들과 무관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들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216항). [평화신문, 2016년 3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3.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③ 그리스도교 영성, 기쁨과 평화

“실재 안에서(in reality) 매 순간을 보다 더 기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적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많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 [소유보다는] 다른 즐거움을 계발하고, 형제적 만남의 만족, 봉사의 만족, 자기들의 은사 개발의 만족, 음악과 미술의 만족, 자연과 접촉의 만족, 기도의 만족을 찾을 때 그렇습니다”(223항).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곧 마음의 태도에 있어서, 대안의 관점을 제안하며,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생활양식을 권장한다(222, 226항). 

 

회칙은 “지난 세기가 절제와 겸손을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은 시대”였다고 단언한다. 근현대의 소비주의 패러다임은 ‘지배의 역학’을 강화하고 ‘쾌락의 축적’만을 강요하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소비재’(222항) 앞에서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 다른 곳에 가서 기웃거리는 그런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223항). 사람들은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며 하느님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모든 것을 무한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지만, 결국 ‘집착과 걱정’(223항)에 사로잡히고 ‘환경의 불균형들을 포함한 다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을 뿐이다(224항).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두르는 가운데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거칠게” 다루며, “피상적 소비자, 공격적 소비자, 그리고 충동적 소비자로 만드는 그런 불건전한 고뇌”에 빠져, 기쁨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다(226항).   

 

그렇다면 회칙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이 제안하는 ‘대안의 관점’,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생활양식’, 그리고 ‘마음의 태도’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다 더 적은 것이 보다 더 낫다’(less is more)는 확신을 갖고, 각각의 사물과(each thing) 매 순간을(each moment) 소중히 여기는 삶이다. 회칙은 이를 “중용과 작은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성장”이라고, 곧 ‘소박함에로 복귀하는’(222항) 삶이며 [집착과 걱정과 고뇌로부터] ‘해방하는 절제’(223항)의 삶이라고 한다. 이는 3장에서 다룬 ‘획일적이며 일차원적 패러다임’을 쫓는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라 할 만하다.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은 생태계들의 통합성뿐만 아니라, “과감하게 인간 생활(생명)의 통합성에 대해서, 즉 모든 위대한 가치들을 촉진하고 통일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대화를 제안한다(224항). 이는 3장에서 다룬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와 ‘실천적 상대주의’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 좀 더 구체적으로는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다룬 ‘배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체계’ 혹은 ‘돈을 우상화하는 새로운 경제독재’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태도라 할 만하다. 

 

셋째, 그리스도교 영성은 ‘경탄할 역량과 함께 균형 잡힌 생활양식에 반영되는 내적인 평화의 회복을 제안한다. 진정한 내적 평화는 생태와 공동선을 돌보는 [외적] 평화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25항).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이 제안하는 “통합의 생태에는 창조와(삼라만상과) 고요한 조화를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태도, 우리의 생활양식과 이상들을 성찰하는 태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며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는 창조주를 관상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교종은 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완벽한 모범을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태도’에 대해서, ‘고요한 정중함’으로 생명(생활)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서, 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 앞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매 순간’을 우리에게 철저하게 살라고 주신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관상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셨을 때, 혹은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는 말씀처럼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며 그의 불안함을 알아보셨을 때, 바로 이 [마음의]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 앞에 그리고 모든 것 앞에(to everyone and to everything) 완전하게 현존하셨습니다”(226항).

 

우리의 영성과 교회의 태도를 성찰한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내세워,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을 정당화하지는 않는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라는 ‘조건절’(條件節)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말이다(1 코린 9, 22 참조). [평화신문, 2016년 3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4.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④ 그리스도교 영성, 사회 · 정치적 사랑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부도덕했고, 윤리와 미덕과 신앙과 정직을 충분히 조롱했습니다. 경박한 피상성이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왔습니다”(229항).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마치 물과 공기가 모든 생명체의 유지와 성장에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 공기와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자연 생태계가 재앙을 맞고 있듯이, 사랑 역시 왜곡되거나 그 가치가 축소되어 사회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랑을 친밀한 육체적 관계로 국한하거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개별적]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시킨” 탓이라 할 수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혹은 교종의 회칙이 극복해야 할 오늘날의 문화로 꼽은, ‘건전한 윤리와 도덕’을 동반하지 않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공리주의’가 낳은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생태 전환을 도모하려는 대화에서, 회칙은 ‘사회·정치적 사랑’이라는 교회의 영성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함께 사랑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로 제시하는데, 특히 사랑이 “사회 윤리 전체의 가장 높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참조). 사랑을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너무 다르다.

 

첫째, 교회의 영성에서 사랑이 사회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우주적 형제 관계’에 대한 확신과 ‘우주적 형제애’에의 소명(부르심) 때문이다. 우리 공동의 가정은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의 호의로 창조하셔서, 인류에게 가꾸고 돌보라는 책임을 맡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 가정에서 인류는 서로 형제이며 누이다. 게다가 뭇 생명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바람과 태양과 구름”조차도 이 가정에서 한 가족을 이룬다(228항 참조). 이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나’의 이기적 욕망에 따른 ‘소유와 지배와 오남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가족이다.

 

우주적 형제애는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모든 행동”으로, 곧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의 헌신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이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과 경제적 관계들과 정치적 관계들이라는 거시적 관계들에도” 영향을 주며, “더욱 큰 규모의 전략들을, 곧 환경의 타락을 중단시킬 전략들을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 스며들게 할 ‘배려(돌봄)의 문화’를 촉진할 전략들을 마련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230항).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랑이 정치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공동체 차원의 행동’, 곧 ‘연대’에의 소명 때문이다. 사회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자연과 사회] 환경을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의(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도 풍요로워진다. 이 공동체 차원의 활동은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공유의 정체성과 기억되고 전승될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연대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 이 연대를 의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의 공동 가정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차원의 행동들이 공동선에 ‘헌신하는 사랑’을 곧 연대의 의식을 드러낼 때, ‘강렬한 영적 경험들’이 될 수 있다(231항 참조).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의 계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대안의 관점과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삶을 드러낸 공동체의 활동이 있었다. 이 땅의 초대 교회의 생활이 그것이다.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 삶이기도 하며, 언제나 기억하고 전승할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오늘의 우리 교회와 교회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정치적 사랑’은 그 용어조차 우리 교회와 교우에게는 매우 낯설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니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이 먹을 것을 갖지 못 했느냐고? 물으니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헬더 카마라 대주교). [평화신문, 2016년 3월 2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5.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⑤ 그리스도교 영성, 성사의 표지들과 쉼의 기념

 

 

“성찬례(성체성사)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적입니다(cosmic)! 성찬례가 어떤 비도시 교회의 초라한 제대 위에서 거행될 때조차도, 언제나 세상의 제대 위에서(세상이라는 제대 위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236항).

 

교종은 인류가 직면한 생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영성으로서 회칙은 ‘관상’과 ‘성사’와 ‘주일’의 영성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상’과 ‘성사’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관상’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느끼는 정도로, ‘성사’는 ‘성당’과 ‘주일’이라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교회의 규정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사랑에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차원’과 ‘사회·정치적 차원’이 있다고 믿는다. 관상과 성사도 그와 유사하다.     

 

교종은 “[우리의] 이상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하기 위해 외부에서 내부에로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all things)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그 길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교회는 ‘관상’의 삶을 제시한다. 참된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 은총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다 더 많이 느끼는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보다 더 잘 배우는 것을 심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뭇잎 하나에는, 산자락 하나에는, 이슬방울 하나에는, 한 사람의 사회적 약자의 얼굴에는 발견되어야 할 신비로운 의미가 있다”(233항). 

 

그렇게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연을 채택하셔서 초자연적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게 물질적 우주의 모든 창조물은 사람이 되신 말씀(the incarnate Word)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사들은(the Sacraments) 그 초자연적 생명의 전달을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가하신 길이다. 그러므로 “물과 기름과 불과 빛깔들”은 ‘성사적 표지’로서 그 상징적 힘과 함께 우리의 흠숭지례(성사)에서 통합된다. “축복하는 [사람의] 손은 하느님 사랑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며, [이 세상에]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반영한 것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자연과 물질의 배척’나 ‘육체의 부정’이 자리할 곳이 없다(235항).

 

창조된 그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로 들어 높여지는 때는 바로 성찬례(성체성사)에서다. 바로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당신의 창조물을 위한 음식으로 내주셨기 때문이다. 첫째, [이제] 그분께서는 위에서 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그분을 모신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신다. 둘째, 이제 우주 천지만물은 성찬례에 현존하시는 육화하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올린다. 셋째, 실제로 성찬례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이다. 넷째, 성찬례는 모든 창조를(삼라만상을) 껴안고 관통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환경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빛을 비추고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되며, 모든 창조(삼라만상)의 청지기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236항). 

 

그러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이해할까? 주일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날만도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일의 의미는 훨씬 심오하다.  첫째, 주일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날”이다. 둘째, 주일은 “주님 부활의 날로서 새 창조의 ‘첫 날’이며 창조된 모든 실재가 도달할 최종 변모에 대한 보증”의 날이다. 셋째, 주일은 ‘관상적인 휴식’의 날로서 ‘노동의 의미’를 완성하는 날이다. 넷째, 성찬례에 중심을 둔 이 관상적 휴식의 주일은 “다른 모든 것에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인간적 소득을 찾게 만드는 그 고삐 풀린 탐욕과 고립감을 막아준다. 다섯째, 노동을 금지하는 주일은 다른 존재들의 권리에 대해 새로운 감수성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주일은 한 주 전체에 빛을 비추고, 우리에게 자연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찾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237항) 

 

우리 사회와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내 욕심대로 거칠게 다룬다. 그 모든 창조물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신비로운 의미’ 혹은 ‘하느님의 흔적(사랑과 정성)’을 찾아내려는 경외의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 생활에서조차 관상의 기도와 성사생활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형식적 규범의 준수쯤으로 환원되기 일쑤다. 주일의 삶은 ‘주일 미사 참례 의무’ 정도로 대치되거나, 그 의무 이행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무자비한 ‘노동’의 짐을 강요하고 강요받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6.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⑥ 그리스도교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성가족’과 ‘공동의 가정’, ‘새 창조의 완성’과 ‘우리의 투신과 투쟁’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관대하게 헌신(투신)하라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여정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십니다”(245항).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본체적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에 집중되어 있다.

 

회칙은 하느님께서 성삼위의 그 본체적 관계들이 지닌 마침 없는 그 ‘활력’을 이 우주의 천지만물 사이의 무궁무진한 관계들 속에 새겨 넣으셨다고 고백한다(240항 참조). 이는 하느님을 (혹은 종교를) 순수한 관념의 영역, 세상 및 역사와 무관한 영역, 기껏해야 하위문화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려는(62항 참조) 태도에 대해서 교회의 신앙을 근거로 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에는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 있다. 교종 자신도 보이지 않는 분께 대한 이 신뢰가 마치 “찾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속 깊은 곳에 잠수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도 “그런 경험을 자주한다”고 고백한다(「복음의 기쁨」 280항). 그리고 회칙은 그 모호함이 우리 “인간의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어두워”지고 “취약”해진 탓으로 본다(239항 참조).  

 

보좌 사제로 사목할 때, 어린이에게 했던 강론 가운데 아직 잊지 않는 내용이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하늘이 잔뜩 흐렸다. 낮에도 그랬고 늦은 오후에도 그랬다. 그래서 온종일 날씨가 흐리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실재’가 그랬을까? 아니었다. 밖과 안 그 사이에 있는 유리로 된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더니 너무나 맑았다. ‘하늘’이라는 ‘실재’(reality)가 흐린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창’이라는 관찰의 도구 곧 ‘관념’(idea)이 흐렸던 것이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길로서 교종은 ‘관상’과 함께 ‘외출’을 권한다. “하느님과의 친교, 다른 사람과 친교, 모든 창조물과의 친교”를 위해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나와 “우주 전체에 걸쳐 엮여 있는 무수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탈출’(exodus)을 말이다. 그 탈출은 맹목적 방황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과 ‘성화’의 거룩한 동행의 여정이다. 그 동행의 여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촌 차원의 연대”라는 영성이 필요하다(240항).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는 “모든 삼라만상의 여왕이며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지혜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예수님을 돌보셨고, 그분의 죽음을 함께 하셨고, 들어 높여져 그분과 함께 계신 마리아께서는 이제 모든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241항 참조).

 

마지막으로 회칙은 ‘나자렛의 성가족’을 돌보신, “자신의 노동과 관대함으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돌보고 보호하신”, 특히 “부당한 자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신” 성 요셉을 소개한다. 교종은 자신의 첫 공식 외부 행사로서 람페두사를 방문하여 참회의 미사를 봉헌했을 때, 무수한 난민의 죽음을 우연한 불행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헤로데’의 불의한 폭력과 우리의 ‘무관심’이 초래한 ‘사건’으로 보았음을 연상시킨다. 회칙은 요셉처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242항)이 되자고 호소한다(242항 참조).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관대한 헌신(generous commitment, 투신)을 불러일으키시고, 당신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청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을(way)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이 세상 한가운데에 현존”하시며,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대지에 확실하게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갈 새 길들을 찾게 해주시기” 때문이다(245항).  

 

그러니 그동안 우리의 무모함으로 공동 가정인 이 행성에 가한 자멸적 상처가 심각하여 가히 ‘재앙’의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 희망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자. 우리의 공동 가정을 돌보려는 우리의 투신과 투쟁은 “천상의 잔치”에 입고 갈 예복임을 기쁘게 받아들이자(244항 참조).

 

오, 주님!

당신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게 하시고.

저희가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하게 하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정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 사랑의 나라, 아름다움의 나라,

다가오고 있는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교종의 ‘삼라만상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평화신문, 2016년 4월 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7·끝. 사회회칙 「찬미받으소서」

 

피조물들의 절규에 응답하고 행동하라

 

 

길을 나서며…

 

우연히 어느 방송인의 이야기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호소, ‘쉼’의 영성을 들었다. 그는 ‘휴식’이라는 한자어 ‘休息’을 풀어주었다. ‘休’는 나무 옆의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며, ‘息’은 ‘나’와 ‘마음’의 관계 곧 ‘나’의 ‘마음’을 살피는 것, 혹은 ‘나’를 ‘마음’으로 헤아려 살피는 것을 형상화한 문자라는 설명이었다.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들로서든 우리에게는 그 ‘휴식’이 시급히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었으며, 그 짧은 이야기가 마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요약하는 듯했다.

 

회칙은 ‘자기 파멸’과 ‘상호 파멸’의 무모함을 멈추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보자고 권한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물과 벗에게서 들려오는 절규를 생생하게 들을 것이라고 한다. 곳곳에 ‘균열이 난 상처’를 또렷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회칙은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의 두려움, 자원(물)의 빈곤과 뭇 생명의 절박함, 오물 덩어리로 변하는 이 행성의 비참함에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닮은 이웃이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가 얼마나 황폐하게 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지구가 얼마나 심각한 불균형으로 휘청거리고 있는지를 깨닫고 행동(동행)하는 여정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회칙 제1장 참조). 이를 회칙은 ‘생태의 전환’의 길로 나서는 것이라 밝힌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회칙은 그 근본적 원인을 ‘인간’에게서 특히 ‘근대’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찾는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제자리 곧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난 근대의 ‘주체’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거기에 인간의 ‘창의력’이 더하여 ‘과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오ㆍ남용과 함께 ‘경제’ 및 ‘금융’이 결탁하여 ‘진보의 신화’라는 ‘거짓’과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패러다임’이 강고하게 구축되었다고 진단한다. ‘과도한’ 혹은 ‘폭압적 인간중심주의’와 ‘실천적 상대주의’(제3장 참조)는 왜곡된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의 가면을 쓰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새로운 사태’를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교종은, 회칙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태 재앙’이 제기하는 도전의 시급성과 광대함과 심각함을 자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응전과 지향이 필요하며(제4장), 그 길로서 모든 이의 정직하고 진실한 ‘대화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길에 교회도 나서야 한다고 호소한다(제5장). 참된 평화의 길을 구축하는 데 따라야 할 원칙들을 교종은 이미 자신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밝혔다. 물론 이 원칙들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복음적 근거를 갖는다. 첫째,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 모색에 인내를 갖고 대화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일치는 갈등을 압도한다. 이는 갈등 요소(차이)를 생태 전환의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을 요구한다. 셋째,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의 과정에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전체가 부분보다 위대하다. 이는 생태 전환을 위한 투신에 있어 다양성과 함께 그 조화의 중요함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회칙은 인류의 생태 전환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밝히면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공의회의 선언을 충실히 따른다. 이를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건전한 영성과 교육이 요구되는데, 그 영성과 교육의 토대를 제2장 창조의 복음에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한다. 그 만남은 ‘관상’의 태도를 불러올 것이다(제6장).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그림’ 하나가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년을 기념하며 교종은 1년을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보내자고 우리를 초대하였다. 이때 모습을 드러낸 ‘그림’에는 예수님의 어깨에 얹혀 있는 우리의 얼굴과 예수님의 얼굴은 겹쳐 있는데, 그 두 얼굴에는 눈이 세 개밖에 없다. 한 눈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공동의 눈’이다. ‘관상’이란 이 ‘공동의 눈’으로 ‘나’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헤아리는 태도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상’은 ‘생태 전환’에 대한 투신을 불러온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투신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사목 목표를 ‘쇄신과 정화’, ‘복음화’ 그리고 ‘대화’라고 선언했다. 교종은 복음과 보편 교회의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그 ‘사목’에 헌신한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교종이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회의 쇄신을 가르쳤다면,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가장 시급한 ‘복음화’의 과제로서 ‘생태의 전환’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쇄신과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해 거침없이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다. “당면한 ‘실재’를 자세히 그리고 완전히 분석하는 것이 교종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 시대 정신을 식별하고 확인하며,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기를 …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51항).

 

* 이번 호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을 마칩니다. 해설해 주신 박동호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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