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링인의 시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7-12-14 11:45:42    조회 : 287회    댓글: 0

대리인의 시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ecosicety@hansalim.or.kr

촛불혁명 ‘이후’의 사회, 어떻게 준비할까

 

자각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들이 모여 일궈낸 ‘촛불혁명’이 정권교체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감이 여느 때보다 높다. 평범한 시민들이 주인공으로 나서 지극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거대 권력구조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촛불혁명은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생각지 못했던 변화를 만들어낸 시민들의 자부심은 클 수밖에 없고, 그만큼 문재인 정부의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크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가 명쾌한 ‘해결사’ 역할을 해주기만을 기대하고 기다려서는 안 될 일이다.

 

새로운 정부 탄생으로 이어진 촛불혁명의 밑바탕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강렬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수개월간 ‘민民이 공화국의 주인’임을 외치고 확인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시민들이 주인공으로서 ‘자기 운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실현하는 데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앞에 나서 ‘해결사’를 자처하거나 ‘대리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떠넘긴 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거나 위기에 빠트릴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강고한 기득권 이익집단이 되어버린 정치권력, 행정권력, 사법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의 폐해를 임계점에 이를 만큼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삶의 기반이 점점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기득권 집단의 부와 권력 세습 행태는 박탈감을 넘어 분노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진보-보수의 이념적 차이 이전에 공공성을 망각한 기득권 이익집단의 존재 자체가 문제의 핵심 원인일 수도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적폐청산積弊淸算’ 이야기가 무성하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왠지 어색하다. 적폐란 말 그대로 오랜 세월 시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폐단을 말하는데 이것을 일거에 뿌리째 뽑아내 청산하자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인식과 접근 방식인지 되묻게 된다.

진보-보수의 이념적 지향과 상관없이, 이해관계로 똘똘 뭉친 기득권 집단이 문제로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들 다수가 여전히 정치, 행정, 사법, 자본의 중심 권력과 연줄을 대려 하거나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적폐의 실질적 청산은 매우 어렵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람을 계속 바꿔도 제도와 시스템은 예전처럼 여전히 힘있게 작동하고 자본과 권력의 영향력에서 사람들의 가치와 판단이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대해 깊은 진단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와 질서를 훼손시켜 온 폐단들을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는 것은 응급조치에 가깝다. 이것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자칫 문제 원인을 나와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 대상화시키고, 성급하게 가시적 결과를 얻어내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사회에 적폐의 씨앗을 자라게 한 바탕에는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해 온 분리주의, 결과주의, 속도주의가 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은 신경과 핏줄처럼 어느새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채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서 찾을 필요가 있다. 체질을 바꾸고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 자체를 바꿔내는 노력이 그래서 중요하다. 당연히 숙성과 성숙을 위한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현실의 문제가 긴박하고 절박할수록 이런 인식과 접근은 중요하다.

벌써부터 공공의 적으로 지목한 대상을 주저 없이 속 시원히 몰아내버리려는 쪽과 정치 보복 운운하며 호시탐탐 반격을 노리는 쪽의 양보 없는 대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무의미한 논쟁과 갈등으로 피로감을 증대시키면서 아까운 시간만 허비할까 걱정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기득권을 붙들어 쥔 채 내세우는 그 어떤 쪽의 명분과 주장도 신뢰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촛불혁명의 의미는 ‘정권의 성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그 속에 담긴 민주주의의 실질적 가치는 시민들 각자가 당사자이자 주인공으로 역할을 찾아갈 때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리인의 권력화와 기득권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믿을 만한 누군가를 찾아 내세우는 데서 멈춰버렸던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크게 한 걸음 더 떼는 노력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일상화와 성숙을 위한 과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더 이상 흔들리고 후퇴하지 않도록 더 넓고 더 깊고 더 단단하게 모든 국민의 삶에 뿌리내릴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직장, 가정을 포함한 민주주의의 일상화로 민주주의 역량을 성숙시키기 위한 노력과 함께, ‘민주주의가 밥’이고, ‘밥이 민주주의’가 될 수 있도록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에 걸맞은 실천이다.

 

먼저, 시민들이 자신에 내재된 힘power within을 자각하고, 대리인에게 맡겼던 민주주의의 역할을 되찾아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원전 신고리 5, 6호기에 대한 중단 여부를 시민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르기로 한 최근의 결정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다.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원전 중단 여부 결정을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시민배심원단을 선정해 3개월간의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중대한 과제를 시민들의 상식적 판단에 맡기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시민들의 반응이다. 더 이상 자신들의 삶과 미래에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를 전문가들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 엘리트주의의 권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다. 소통을 매개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짜뉴스’와 같은 부작용도 만들어내지만 전체적으로 정보와 지식의 독점을 해체하고 공유의 기반을 급속히 확대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당사자 직접참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대리인 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바꿔내고 있다. 이번 공론화 과정의 성과에 따라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등 사회적 영향력과 파장이 큰 주요 사안들에 대해 보통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결정의 영역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번 공론화 과정이 담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의 원리다. 숙의deliberation 과정의 핵심은 기존에 각자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넘어서 학습과 성찰, 합의를 통해 성숙한 의사결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공론화 과정을 특정 사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정하는 의사결정 수단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논의의 대상을 신고리 5, 6호기로, 논의 주체를 시민배심원단 범주로 한정한 채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에너지 문제의 본질에 대한 시민 다수의 인식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실질적인 문제 해결은 요원하고 사회적 갈등만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신고리 5, 6호기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우리 사회 전체가 에너지의존형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중요한 학습의 기회가 되도록 준비하고 진행해 나갔으면 한다.

 

 

경제의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의 역할에 대하여

한편, 정치 민주화를 넘어 경제의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도전도 필요하다. 그동안 경제 민주화 논의는 재벌개혁과 노동 환경 개선, 분배구조의 전환 등이 주요 관심사였다. 이 점에서 이번 문재인 정부는 경제 민주주의와 관련해 사회적경제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이 새롭다.

실제로 정부는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사회적경제의 역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 ‘사회적경제발전위원회’ 신설, ‘사회적경제 기본계획’(5개년) 수립, ‘한국사회적경제개발원’ 설립, ‘사회적경제 권역별 통합지원센터’ 설치 등 다양한 제도적 기반과 지원 수단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와 함께 사회적경제 영역의 생태계 조성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적경제에 대한 자금 및 세제 지원, 관련 제품 판로 개척과 공공조달, 인력양성 지원 등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고 있고, 도시재생 및 지역공동체 발전도 사회적경제 영역과 연계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적경제에 대한 정부의 다양한 지원 조치의 배경에는 일자리 창출이 핵심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어 성과를 관리하듯이 일자리 창출을 국정운영의 핵심 과제로 삼고 있는데, 사회적경제 영역 또한 이런 기본 틀 속에 위치한 모습이다.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일자리위원회’의 전문위원회 속에 공공과 민간 외에 사회적경제 영역 일자리가 다뤄지고 청와대 일자리 수석 산하에 사회적경제 비서관을 두고 있는 것은 사회적경제 영역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점이다. 일자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경제의 주요 역할을 일자리 창출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치 협치governance가 정부의 역할과 책임을 시민사회 영역으로 떠넘기기 위한 수단이 되지 말아야 하듯이 사회적경제 역시 이런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사회적경제의 등장 배경에서처럼 사회적경제의 본질적 사명과 경제 민주주의의 과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회적경제의 시대적 역할은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자본의 이윤보다 사람의 노동을 중시하면서 사회·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경제에서 ‘사회적’이란 말은 ‘경제’에 대한 하나의 수식어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담아 경제의 성격과 역할을 바꿔내는 것이고, 따라서 경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력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한 정부의 지원과 개입, 간섭이 확대되고, 동시에 사회적경제 영역의 제도 의존성이 커지게 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사회적경제를 통한 협동과 공동체 사회의 실현은 필요와 열망을 가진 당사자들 ‘스스로自’의 주체적 판단과 결단을 통해 자율, 자립, 자치, 자조의 힘을 길러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한편, 최근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조치도 경제의 민주주의와 삶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접근되고, 이와 관련한 사회적경제의 역할을 높여나갈 필요가 있다.

정부는 내년 최저시급을 올해 6,470원에 비해 1,060원(16.4%) 인상된 7,530원으로 정하고 2020년까지 1만 원으로 인상할 계획을세우고 있는데,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으로, 그 명분과 정당성은 분명하다. 물론 임금 인상으로 비용부담이 커진 영세사업자들이 폐업하거나, 무인화나 셀프서비스 도입 또는 생산시설을 노동력이 값싼 해외로 이전시킴으로 인해 오히려 일자리가 축소될 수 있다는 등 비판의 목소리도 있으나, 이들이 지금과 같은 우울한 노동의 현실을 개선할 뚜렷한 대안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비용 부담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종합적인 접근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소득주도형 성장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정부의 태도는 한계가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수혜자로서 소비를 확대하여 경기 활성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시민의 역할을 위치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시민들이 삶의 주체로서 경제적 공동체의 기반을 스스로 확장해나가는 데 있어 최저임금 인상의 의미를 적극 살려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적경제의 역할도 잘 찾아냈으면 한다.

사회적경제는 지역재생과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기반으로서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줄이고 효과성을 높이는 데 필요하다.

즉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자립과 순환의 경제를 통해 소득의 역외 유출을 막고 임금 외에 다양한 소득의 기회들을 마련해 볼 수 있다. 자작自作한 물건을 판매하는 장터가 서고 지역화폐를 통해 노동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호혜적 활동을 활성화할 수도 있다. 또한 필요에 대한 공동체적 해결을 통해 지출 자체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즉 삶의 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지출을 줄이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상호 신뢰와 협력을 통해 주거, 복지, 교육, 식생활 등 생활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가안정이 핵심 과제인데 여기서 농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농업의 희생을 대가로 물가를 안정시켜 왔다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농업의 회생을 통해 자립과 순환의 지역경제를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농업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할 때

작년 초 스위스 다보스 지역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을 통해 불쑥 나온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1년 새 우리 사회 담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정치, 경제, 과학기술, 노동, 교육, 농업 등 온갖 주제와 영역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고, 이 주제와 관련된 각종 포럼과 토론회는 물론 수많은 매체와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대선 과정에서 4차 산업혁명이 국가의 미래와 밀접한 과제로 이야기된 이후 이런 현상은 불붙은 데 기름 부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4차 산업혁명은 그 의미가 모호하고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한 막연하다. 곳곳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는 잘 모르니 불안감만 커진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세상의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니 조바심만 앞선다.

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고 있음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과학기술의 빠른 발달로 생산과 소유, 노동양식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고, 사람들의 상호관계와 의식체계, 삶의 양태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런 변화들을 잘 읽어내고 미리 대비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담론의 쓰임새와 유포 과정은 여러 모로 아쉬움이 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새로움과는 달리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정당화 논리로 4차 산업혁명 담론을 끌어들이는 익숙한 모습이 발견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을 내세워 고도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결합한 성장위기 탈출 방안을 찾는 데 집중하면서 정작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농업과 식량의 중요성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가진 혁신의 잠재력도 결국 1차 산업이라 불리는 농업이 지탱해주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런데 첨단 기술혁명으로 미래를 향한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주류적 삶의 공간이자 방식이었던 농촌과 농업은 어느 새 아득한 과거의 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21세기의 미래 전망을 탐색함에 있어서도 농업과 농촌은 뒷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담긴 농업, 농촌, 먹거리와 관련된 정책들을 보면 농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구조 대개혁에 대한 촛불 시민들의 열망을 제대로 읽고 담아내려 했는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경쟁력을 앞세운 성장의 수단으로서 4차 산업혁명의 논리를 농업 분야에 이식하려는 모습들도 보인다.

 

생산과 소비를 기능적으로 분리한 채 효율화를 추구해 온 경제 중심적 사고는 자본의 고도의 지배전략을 반영한 것이다. 사실 한살림과 같은 생활협동운동 조직이 직거래를 통해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는 협동의 경제질서를 새롭게 만들고자 한 것은 이런 자본주의의 주류 흐름을 넘어서려는 데 있었다. 그 정신을 지금 시대로 이어서 살림살이 주체들의 자립과 자치를 통한 삶의 공간을 농업과 농촌을 기반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농촌이 삶의 공간으로 매력 있게 자리할 수 있을 때 도시도 탈출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으며, 귀농과 귀촌 흐름도 지속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농업과 농촌은 경제적 지속가능성은 물론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돌봄과 치유를 포함한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기본 토대이기 때문이다.

모심과 살림 9호(2017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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