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가난이 싸울 때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8-05-31 11:58:00    조회 : 244회    댓글: 0

 

[공감]가난과 가난이 싸울 때

한지혜 | 소설가

입력 : 2018.05.29 20:47:02 수정 : 2018.05.29 20:47:46

김치나 장아찌 같은 저장반찬을 만들 일이 있을 때나 주로 다니던 시장을 요새는 작정하고 다닌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때와 시장에서 장을 볼 때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대형마트에서는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세일이라는 문구에 혹해 사게 되는 데 반해 시장에서는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느라 꼭 사야 하는 물건을 한두 개씩 빼먹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것을 산 것보다 한두 개 깜박하고 덜 산 게 나은 것 같다. 소비 효율에서도 그렇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는 요령도 터득한다. 시장에 다니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작은 가게에서 적은 물건을 구입할 때는 웬만하면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영세업자들의 카드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다. 현금을 내밀 때마다 나는 뭔가 착하고 선량한 시민이 된 기분이다.

 

[공감]가난과 가난이 싸울 때.
그래서 이 원칙도 ‘성실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영세업자’들에게만 적용한다. 카드를 아예 받지 않거나 불친절한 가게는 작정하고 탈세를 하려는,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군가의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거래를 하지 않거나 부득불 카드 거래를 고집한다. 나는 그것이 정의라고 착각한다.


비슷한 선의를 나는 하나 더 실천한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냉장고에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비타민음료를 조금 여유 있게 챙겨둔 것이다. 택배 기사나 집배원 같은 배달 서비스를 해주는 분들이나 방문 서비스를 해주는 분들을 위한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감사라도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전 연락이나 안내 없이 아파트 입구에 물건을 놓고 가거나 불친절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에게는 당연한 듯 음료를 생략한다. 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건 나의 치사함이 아니라 그분들의 불성실과 불친절이 초래한 결과라고 믿는다. 선택적 선의가 오히려 더 큰 갑질이고 폭력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나는 애초의 ‘선의’에만 집중한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변명하는 것이다.


어제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날마다 커피를 사들고 도서관에 오는 이에게 ‘공시생인 것 같은데 매일 커피 사들고 오는 건 사치 아닌가’ 하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지니 자제를 부탁 바란다는 쪽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미 작년에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일이라 하고,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충분히 있었다 하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뒤늦게 앞서 언급한 나만의 정의, 나만의 선의를 자각한다. 쪽지를 붙인 사람과 상황은 다르지만 노동자의 삶은, 영세업자의 삶과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며 타인의 수준과 태도를 제한했다는 점에서 쪽지를 붙인 사람과 나는 같은 경솔을 저지른 것이리라. 식권 발급 받아 쓰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비싼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게 말이 되느냐며 비난하던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인 것이다. 인터넷상의 여론도 대체로 그런 경솔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의 경솔과 다르게 그 쪽지 주인공의 경솔은, 그 경솔을 초래한 박탈감의 무게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매일 들고 오는 저가의 커피마저 닿을 수 없는 사치로 느껴지는 삶의 경솔은 제 돈 아껴 모아 밥 사먹는 식당에 기초수급권자가 정부가 준 식권으로 편안히 와서 밥을 먹는 게 불쾌하다고 말하는 경솔이 아니라 식권 한 장으로 여러 식구가 견뎌야 하는 사람이 한 장의 식권으로 혼자만 견디면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저지른 경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 가난과 싸울 때, 어느 가난이 마땅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동계도 재계도 반발하고 있다. 최저임금 대상자와 영세업자들의 입장은 어떠할까. 서로 긴 싸움을 예고하는 중인데, 가난을 볼모로 가난과 싸우게 하는 싸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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