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태적 전환, 이렇게 시작해봅시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2-02-05 18:23:42    조회 : 150회    댓글: 0
2022년 01월 28일(금)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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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수대의 비유'라는 말이 있다. 개수대는 발전과 편리를 앞세운 현대 문명의 상징이다. 어디선가 물이 흘러와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눈 깜빡할 사이에 깔끔하게 없어지는 곳, 그곳이 개수대다. 마을 공동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개별 가정의 필요를 채우던 시대를 지나, 집마다 수도가 들어오고 주방과 화장실에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는 개수대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편리를 경험하고 문명 발전에 경탄했다. 이 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들어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관심 없이 이 개수대를 깨끗이 관리하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소위 오늘날 문명 세계, 도시의 삶이다.

개수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도 거리에 나가면 반짝반짝 빛나는 과일, 채소, 윤기 도는 생선과 고기, 수많은 물건들이 진열대에 깔끔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난 듯 거기에 그렇게 있다. 살아있던 동물들이 도축장을 거쳐 시장을 돌아 우리 식탁에까지 오르지만, 우리는 먹기만 할 뿐,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죽고 가공되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 손에 들어온 물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내 손에까지 들어오는지, 또 내 손을 떠나면 어디로 흘러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심이 없다.

깔끔한 도시의 삶은 하얗고 깨끗한 개수대의 모습과 같다. 이 도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땅과 하늘과 바다가 어떻게 황폐해져 가는지, 지역과 농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그것을 공급하느라 어떤 희생을 하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쓰고 버려진 도시의 수많은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땅과 바다가, 가난한 지역의 환경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관심이 없다.

삶의 생태적 전환이란, 우리 삶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이 모든 삶의 조건들을 향한 통전적인 시각을 갖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문명의 이면, 즉 개수대 너머의 보이지 않는 관계들까지 시각을 넓히고 파괴와 일방적인 착취를 넘어 균형과 조화를 추구할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삶의 생태적 전환이 가능해진다. 필요를 넘어 욕망에 가까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착취되고 파괴되는 피조세계를 돌아보고 그 관계를 바로잡는 일이 생태적 전환의 시작이다.

'녹색교회'는 우리를 거쳐가는 모든 것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전 과정으로 시선을 돌리고자 애쓰는 교회이다. 화려한 도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폐해지는 농촌을 돌보고, 건강하고 정의로운 먹거리의 생산과 유통을 위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농산물 직거래를 하는 교회가 녹색교회이다. 동물들이 단지 인간을 위한 먹거리로만 태어나 죽지 않도록 동물 복지를 위해 애쓰는 교회가 녹색교회이다. 도시를 밝히는 불빛을 위해 농촌의 산과 들이 석탄, 원자력, 태양광 에너지 건설로 몸살을 앓지 않도록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교회가 녹색교회이다. 도시의 버려지는 폐기물들이 농촌의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최소한의 소비와 폐기를 위해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고, 제로웨이스트 운동을 하고 재활용을 고민하는 교회가 또한 녹색교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모든 생명 안에 깃든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살아가는지를 세심한 눈으로 살피고, 그 안에서 거룩함을 빼앗기고 파괴되는 존재가 없도록 돌보고 지키는 일이 우리의 마땅한 일이다. 자기 앞의 개수대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연결된 모든 생명의 삶의 조건들에 전반적인 관심을 갖자. 기후위기 시대,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생태적 전환은 여기에서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이현아 목사 / 기후위기기독교비상행동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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