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현대인들의 음악, 그리고 영적 체험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3-25 11:26:56    조회 : 323회    댓글: 0
(11)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상)

공산정권 어둠 속 음악으로 구원의 희망 증언
성악곡 주제는 성경과 전례문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현대적으로 표현
‘요한 수난곡’ 깊은 영적 감동 줘


발행일 : 2016-03-20 [제2986호, 16면]


 ▲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와 그가 작곡한 ‘요한 수난곡’.(출처 juilliard)

 
현대인들과 음악, 그리고 영적 체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은 언제라도 음원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음악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이어폰을 끼고 주변과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머무는 모습은 일상의 풍경입니다. 원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쉴 새 없이 음악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걸을 때 이러저런 음악이 들려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대개는 음악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음악이 그저 소리로, 심지어는 소음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노래 한 곡이 우리들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차가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새삼 음악이 ‘도시의 광야’를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귀중한 ‘지상의 양식’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좋은 음악은 정서를 어루만져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때로는 사람들을 영적인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음악이 영성을 담고 표현하는 탁월한 도구라는 뜻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직접적이며 생생한 영적 체험의 순간을 만나게 하는 ‘영성의 샘’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기도인 ‘시편’이 노래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양 음악사에서 근대 시대가 도래하기까지는 성경 말씀과 전례문,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내용, 개인의 삶 안에서의 신앙과 영적인 체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성음악’(Sacral Music)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성음악들은 시대를 넘어서 언제나 새롭게 신앙인들에게 영적 회심과 신앙적 통찰의 계기를 주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레고리오 성가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b 단조 미사’, 헨델의 ‘메시아’와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들으며 정서적 감동과 미학적 숭고함을 넘어 영적 차원의 변화를 체험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숙고하고 관조하는 삶의 방식을 불필요하게 여기고, 마음은 삭막해지고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지며 관계는 피상적이 되어 마침내 종교적 체험도 울림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우리가 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이러한 음악의 영성적 힘은 더없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시대에도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영성적 자각을 체험케 하는 음악이 여전히 쓰여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 자체도 매우 다양하게, 그래서 때로는 왜곡된 의미로 쓰여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요즘입니다. 그러기에 영성적 음악이라 하면 먼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어느 정도는 도피적 정서를 만족시키는 ‘뉴에이지’ 음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성’이란 말 속에 담긴 체험의 풍요로움과 의미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식별하는 수고로운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문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만나기 위해서는 작곡자만이 아니라 듣는 이도 갈망과 개방성과 결단을 간직한 구도자이자 모험가의 자세를 지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분열되고 상처 입은 시대를 감싸 안으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을 거스를 줄 아는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간직한 음악은 나른함과 사탕발림의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도전을 대면하는 용기를 표현해야 하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신비체험에서 감도는 침묵이야말로 언제나 영성의 원천임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구원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희망을, 깊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기다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처럼 현대 음악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샘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1935~)의 음악과의 만남은 놀랍고 반가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르보 페르트의 ‘요한 수난곡’을 듣다

아르보 페르트는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현대음악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자신의 중요한 성악곡들의 텍스트와 주제 대부분을 성경과 전례문에서 가져오기에 교회합창 음악가로 분류되지 않는, 저명한 현대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치밀하게 음악언어를 탐색하면서도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일관되게 음악의 핵심적 요소로 삼고 있는 그의 음악은 그 자체가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영성적 가치를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스토니아의 파이데에서 태어난 그는 에스토니아가 아직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의 음악원에서 그의 스승 하이노 엘러 밑에서 작곡 수업을 하는 한편 탈린 방송국에서 음향담당을 하며 당시 서방의 가장 전위적인 음악작품들을 풍부하게 듣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공산진영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벨라 바르톡에게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풍의 작곡에서 시작하여 그는 점차 당시 서방 음악 작곡계의 중심 움직임이었던 ‘12음 기법’과 ‘음열주의’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공산주의 문화계 간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요주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만, 정작 시간이 지나 동구권 작곡가들도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게 일상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런 흐름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음악과 영성이 만나는 시원을 탐구하며 새롭고도 오래된 음악언어를 모색해 갑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그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며 받은 감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종소리’를 뜻하는 어원에서 온 ‘틴틴나불룸’(tintinnabulum)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게 되는 음악적 방향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음악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성경 묵상에서 오는 신앙적 확신과 영성적 체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한 초기의 대표곡이 바로 요한 복음 18-19장 수난기의 불가타 라틴어 번역을 텍스트로 삼은 ‘요한 수난곡’(Passio Domini nostri Jesu Christi secundum Joannem)입니다. 바리톤이 맡은 예수님, 테너가 맡은 빌라도, 4중창의 복음사가, 거기에 바이올린, 오보에, 첼로, 바순이 하나씩 선율에 참여하고 오르간이 곁들여지는 소규모지만 극히 정교한 편성을 지닌 이 곡에서 페르트는 수난 복음의 낭독 그 자체로 가장 깊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음악 미학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도 공산주의 정권 치하였음에도, 명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음악적으로 또 공적으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는 큰 논란이 되었고, 그는 결국 1980년에 가족과 함께 사실상 추방 위협 속에서 독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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