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하)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4-05 08:44:37    조회 : 357회    댓글: 0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3)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하)

영혼을 비추는 음악, 사랑과 구원 갈망 담아
 독일에 정착 후 창작활동 본격적으로 시작
‘틴틴나불리’ 기법 전례음악에 잘 녹아들어


발행일2016-04-03 [제2988호, 20면]

    
아르보 페르트의 여정과 그의 벗들

아르보 페르트는 침묵과 성찰, 모색과 시도의 긴 시간 속에서 시대를 위로하면서도 시류에서 자유로운 ‘영원함’의 흔적을 담을 수 있는 고유한 음악의 길을 발견합니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새롭고도 영적인 영감이 깃든 곡들을 잇달아 내놓고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안에서 페르트는 그의 신앙고백과 음악관에 대한 당시 정권과 예술계 관료들의 비판, 다른 음악가들의 질시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는 기관원들로부터 스스로 이민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해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번 받습니다.

결국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주 장소를 찾는데 난관을 겪었지만 저명한 음악가 알프레드 쉬니트케가 연결해준 한 음악 출판사 도움으로 난민수용소에 머무는 대신 바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에게 빠른 시간 안에 국적을 부여합니다.

이후 그 다음 해에 역시 쉬니트케의 도움으로 독일정부로부터 최소한의 안정적인 생활과 창작을 위한 여건을 가능하게 하는 장학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으로 이주해서는 서방에 정착하여 음악 창작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베를린은 계속하여 그의 거주지로 남습니다. 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맺고 있는 각별한 관계는 1990년 베를린대교구에서 개최된 90번째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을 위해 작곡한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성전에서의 미사 전례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 곡에서 ‘틴틴나불리’의 음악미학은 로마전례의 경건하고 간결한 고유양식에 잘 녹아들고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5월 24일 베를린대교구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봉헌된 ‘가톨릭의 날’ 정점이 된 장엄미사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음악에 전념한 페르트는 잇달아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고 그의 음악은 독일어권을 넘어, 전 유럽과 특히 영국으로, 이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2010년, 노년에 이른 아르보 페르트는 비로소 자신의 고국에 거처를 마련하고 긴 여정 끝에 귀향합니다.

아르보 페르트는 서방으로의 이주 이후 새로운 작품을 작곡했을뿐더러 자신이 예전에 내놓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수정 보완하고, 그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연주자들을 통해 실연해보려 애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음악을 알아보고 완벽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동반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영국의 성악가이자 지휘자, 음악학자인 폴 힐리어(Paul Hillier)였습니다. 그는 정교하고 완벽한 가창과 뛰어난 곡해석, 틀에 박히지 않는 음악적 모험으로 유명한 고음악 단체 ‘힐리어드 앙상블’(Hilliard Ensembles)의 공동 창립자로서 1990년까지 이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음악학자로서 페르트의 음악미학에 대해 중요한 연구와 저서를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1990년 이후에는 자신이 창설한 성악그룹 ‘Theatre of Voices’를 통해 페르트의 후기 걸작들을 뛰어난 연주와 녹음으로 전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폴 힐리어를 통해 페르트는 자신의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과 영적인 힘을 ‘힐리어드 앙상블’의 탁월한 연주로 구현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이들을 매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요한 수난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처음 뮌헨의 루카스 교회에서 초연되었을 때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입각한 수난복음의 영창과 그 음절 사이 침묵에 청중들이 익숙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지만, 연주자들 역시 이 곡의 낯선 기법과 정신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힐리어드 앙상블은 작곡가 페르트마저 탄복한 완벽한 음악적 테크닉과 해석력, 곡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이 음악의 가치를 연주회에서, 녹음에서 잘 드러냈습니다. 이 곡 외에도 폴 힐리어와 힐리어드 앙상블을 통해 ‘데 프로푼두스’(De Profundus)나 ‘칸타테 도미노’(Cantate Domino) 같은 페르트의 전환기 이후 중요한 곡들이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페르트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또 한 명의 벗은 독일 재즈 음악가이자 음반 제작자인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였습니다. 아이허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가장 혁신적인 음악 레이블인 ECM 레코드를 설립하고 키워온 사람입니다.

 

  ▲ 아르보 페르트는 1990년 5월 24일 베를린대교구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봉헌된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 장엄미사에서 이날을 위해 작곡된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를 연주했다. 사진은 성 헤드비히 대성당 전경.
(출처 위키미디어))


새로운 유형의 실험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재즈 명반들을 제작하던 그는 우연히 차에서 방송되던 페르트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현대음악과 고음악, 클래식 음악, 민속음악 등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을 넘나들며 투명하고 심오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ECM 뉴시리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페르트가 이탈리아 음악학자 엔조 레스타뇨와의 대담에서 여전히 감탄하며 회고하듯, 아이허는 놀랄만한 정열과 장인적인 능력으로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 앨범 ‘타불라 라사’를 1984년에 내놓았습니다. 이 앨범은 페르트의 음악을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 바이올린 주자 기돈 크레머가 참여한 이 앨범은 ‘프라트레스’(Fratres 형제들이여) ‘칸투스’(Cantus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찬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빈 서판/순수한 마음) 등 그가 ‘틴틴나불리’ 기법을 확립한 후 아직 에스토니아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대표작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음악은 한동안 필립 글래스나 스티브 라이히 같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주도한 ‘미니멀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르보 페르트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라이히의 도시적인 사고와 감수성, 필립 글래스의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에 영향받고 뉴에이지적 경향을 지니는 종교관이 다르듯, 페르트의 음악적 방향 역시 현대의 미니멀 음악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비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침묵과 고요를 추구하는 음악이 지니는 독자성은 점점 더 함께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었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음악은 세월과 함께 ‘틴틴나불리’라는 기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렵게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자비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길을, 빛과 사랑의 침묵과 공허하지 않는 고요를 담은 소리 속에서 탐구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그의 음악은 ‘프리즘’처럼 우리의 영혼을 드러내고 청자로 하여금 내면에 깊이 간직된 사랑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만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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