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하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5-08 19:26:07    조회 : 329회    댓글: 1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11>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하

노예들의 신앙과 한을 담은 미국판 아리랑
2016. 04. 03발행 [1358호]


노예들의 신앙과 한을 담은 미국판 아리랑

▲ 1871년 흑인 영가를 부른 최초의 흑인그룹 주빌리 싱어즈 단원들. 흑인들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통이 담긴 흑인 영가를 널리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한 첫 그룹이다.


미국 흑인 노예들은 백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요당하다시피 했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서 전해 들은 성경의 여러 인물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들은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의 씨앗을 싹 틔우고자 했는데, 이런 가운데 흑인 영가가 탄생한다. 가장 유명한 영가 중 하나인 ‘딥 리버’(Deep River)에서 이들은 이렇게 희망을 노래한다.

“깊은 강, 나의 집은 요르단 강 건너에 있네. 주님 깊은 강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 야영지(사실 해방된 장소를 상징)로 가기 원합니다. 오, 당신은 원치 않으십니까? 약속된 땅, 잔치가 열려 있고, 모든 것이 평화스러운 곳, 오, 주님 깊은 강을 건너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

1867년 최초 흑인 영가집 「미국 노예들의 노래집」이 출판됐고, 이어서 1871년에는 레이드(A. Reid) 목사가 조직한 최초의 흑인 그룹인 ‘주빌리 싱어즈’(The Jubilee Singers)가 피스크대학의 신앙집회에서 첫 연주를 하면서 흑인 영가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모세보다도 이들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던 인물은 바로 ‘예수’였다. 매질과 가시관의 고통과 모욕,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던 그 모습 속에서 이들은 탈출을 감행했다가 붙잡혀 매질을 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어간 가족이나 동료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은 이들이 실제로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 절절하게 표현된 노래가 바로 489번 성가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이다.

이 노래는 노동요와 같은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개인의 선창과 집단의 후렴이 돌아가며 부르는 구조를 띠고 있다. 재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즉흥 연주의 기원도 이 개인의 선창 부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89번 성가의 가사는 이런 식이다.

개인의 선창: ‘당신은 거기 있었나요? 그들이 내 주님, 십자가에 매달을 때?’

선창자의 삽입구: ‘때로는 이 때문에 전율하고 몸서리치며 떨게 된다네.’

함께: ‘그대 거기 있었나요? 그들이 내 주님, 십자가에 매달을 때?’

이 영가는 ‘내 주님을 못 박을 때’를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을 때’나 ‘무덤에 누일 때’ 등으로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가톨릭 성가」 책에 수록된 가사처럼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이라고 노래할 때 사실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가 똑같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투영시켜 같은 고통 속에 잠겼다. 우리의 ‘아리랑’이 그러한 것처럼 노래들은 때때로 그 노래를 처음 불렀던 이들의 고통이나 환희의 체험에 동참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489번 성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뿐 아니라 흑인 노예들이 겪었던 비참함과 더불어 여전히 오늘날 고통 속에 잠겨 있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노래의 힘이다.

<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댓글목록

작성자: 미리내님     작성일시:

문득 알렉스헨리의 '뿌리'가 생각 납니다
쿤타킨테가 넘 가엾어서 몇번을 읽으며 울었던...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이기적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