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라크루아(1798∼1863)-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작성자 : 미리내    작성일시 : 작성일2017-01-29 17:15:12    조회 : 3,012회    댓글: 2
<자화상>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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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힌다.
작품의 소재는 종교·신화·문학·역사에서부터 현실의 풍속·인물·풍경·정물 등 다양하다. 벽화·장식을 포함한
유화 외에 데생·수채화·파스텔 화·판화 등 방대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예술에 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일기·평론·편지 등에 많이 기록하여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구사하여 현실을 초월한 진실 속
에 상상 세계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영웅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표상이 담겨 있다.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붓놀림과 색의 광학적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이국적 취미에 대한 열정은 상징주의 운동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훌륭한 석판 인쇄공으로
써 들라크루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스코틀랜드 작가인 월터 스콧, 독일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등의
많은 작품들을 묘사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이 있다.

그의 주요한 라이벌인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적 완벽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예술과 베
네치아 르네상스의 화가들에게서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다는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은 그의 성숙기의 주된 테마의 특징이 되었고, 그리스나 로
마 예술을 고전적으로 모방하기보다 이국성을 찾아 북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친구이
면서 정신적인 상속자로서 들라크루아는 자주 난폭함을 보여주는 "장엄의 힘"에대한 강한 동일시를 공유했던
바이런에게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감상성이나 과장에 젖어 들지 않았고, 그의 낭만주의는 개인주의자의 그것이었다.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있었으나, 열정을 표현하는데
에는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하게 결연했다." 대표 작품으로 <키오스 섬의 학살> <단테의 배> <민중을 이끄
는 자유의 여신> 등이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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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325,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대중들이 영웅을 기대하는 것은 영웅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하지만 시대
는 영웅을 탄생시키지만 영웅은 역사를 쓰지는 못한다. 역사는 민중들에 의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샤를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중 가장 격렬
했던 1830년 7월 28일의 장면을 사실주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으로서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다. 하늘을 덮고 있는 포화 연기 사이로 여인이 중앙에서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고
옆에 총을 든 어린 소년과 총칼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이 돌과 보도블록, 건축물로 세운 임시 바리
게이트를 넘어 전진하고 있다. 어두운 하늘은 혼란스러운 대적 상황을 암시한다.

화면 오른쪽 포화 연기 사이로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혁명 당시 노트르담의 성당의 탑에 아침
부터 삼색기가 꽂혔다. 여인은 프랑스 대혁명 당원이 쓰던 붉은 모자 프리지아를 쓰고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삼색기는 1789년 루이 16세가 봉기군의 적청색 모표를 자신의 흰색 문장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는 여인이 들고 있는 삼색기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 미래를 상징한다. 국민군으로 참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
오른쪽 모자를 쓰고 정장을 입은 채 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인이 민중들과 다르게 옷을 벗고 있는데 여인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을 상징한다.자유의 여신은 고대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은 화면 앞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에게 느껴지는 잔인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벌거벗은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1830년 혁명과 함께 최고의 지위에 오른 루이 필립의 마음에
들어 국가에서 구입했다.

들라크루아는 인물, 풍경, 정물,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의 내적인 감정으로 담아냄으
로서 근대 회화의 기틀을 마련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화가이면서도 잡지에 기고
하거나 논문 또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펼칠 정도로 뛰어난 문필가로 활동했다.
(박세실 문화에디터)


                                키오스 섬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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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은 1822년에 그리스의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 있던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 혁명을
도모했는데, 이를 진압하면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한 사건이 키오스 섬의 대학살이다.
이 사건은 자유주의를 지지하던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들라크루아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 사건을 소재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사건을 대하던 프랑스인의 정서와 달리,
그림은 ‘위대한 그리스인의 해방 투쟁’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의 뗏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영향을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혁명
’이라는 정신보다도 ‘재난’이라는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재난에 처한 인간 군상을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한 것도 제리코의 영향을 읽을 수있는 대목이다. 비평가들은 그림에서 드러나는
객관적 시선을 불편하게 여겼다. 주제 의식과 그림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비평가 앙토넹 장 그로는 이 그림을 “예술의 학살”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비난을 사긴 했지만, 들라
크루아의 그림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죽어가는 어머니
의 모습은 프랑스인의 정서에서 본다면 ‘공화국의 죽음’과 겹치는 상징이기도 했다. 또한 들라크루아는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아서 독창적인 빛과 색채의 효과를 화폭에 담아냈다. 강한 붓놀림
으로 색을 겹쳐 칠함으로써, 역동적인 빛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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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의 배

“어떠한 회화도 이 위대한 작가의 미래를 이처럼 잘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1822년 티에르에서 24세의
젊은 들라크루아가 살롱에 그의 첫 작품이 입선하던 때 받은 찬사이다.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신곡> 중 “지
옥편”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와 어두운 소재와 구성의 드라마틱한 깊이감 그리고 강렬한 근육의 표현의 미켈
란젤로와 확연한 빛의 음양을 구사한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이 예술가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곧이어
낭만주의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 고전주의자들은 고대그리스, 라틴 문화를 모방하는데 시간을 모두
투자했다. 그들은 더 이상 요구되는 새로운 취향에 부합할 수 없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다양한 감수성과 관점의 방식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독자들은 이 새로운 어두움을 통한 상상력에 영향을 받았다. 들라크루아의 이 작품은 화단에많은 반향을 이끌
어냈다.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신곡>을 완벽하게 읽어냈으며, 마침내 이를 낭만주의회화로 이끌어냈다. 비록
신화적 전통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 작품은 이태리의 시인인 단테를 대표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베르길리
우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을 방문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곡>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옥편, 연옥편 그리고 천국편이다. 고전적인 이시는 단테
와 베르길리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소년시절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지옥,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
러 삼위 일체의 비밀에 접하는 순례기이다.여기에서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에기아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너는 장면을 그려낸다. 붉은 두건을 쓴 사내가 단테이고, 그 옆에 베르길리우스가
그리고 노를 젓는 플에기아스(Plégias)가 있다. 이들의 배에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이 구원을 바라며 매달리고
있다


                              어미 호랑이와 장난치는 새끼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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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 호랑이와 장난치는 새끼 호랑이

사자나 호랑이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특별했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40마리 이상의 사자,
호랑이를 그렸다. 그중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몇 가지의 이유로 들라크루아의 동물화 중
에서도 예외적인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그의 다른 동물 그림들에 비하여 2미터에 육박하는 큰 사이즈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1831년의 살롱전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거
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때 그는 이 작품과 함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역시 발표했는데, 이 작품
에 거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830년 7월의 혁명을 주제로 담고 있는 생
생한 역사화에 대하여, 혁명을 직접 경험했던 당시의 관람객들이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작품이 그의 다른 동물화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경계하면서 새끼들을 지키는 암컷
호랑이가 매우 온화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나 호랑이는 대부분 폭력
이나 잔학함을 상징하는 모티프로서 사나운 맹수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 작품의 호랑이는 그와는 달리
한층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당시 조각가 바리와 함께 파리 식물원 내의 작은 동물원을 돌아다녔던 들라크루아는 호랑이의 모습을 세심
하게 관찰했는데, 특히 호랑이의 몸, 머리, 다리 등의 해부학적 요소를 관찰하여 여러 차례 습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그의 동물화 속 표현과 묘사는 한층 더 세밀하고 정확해졌다.당시 비평가들 중에는
들라크루아가 사람보다 동물을 더 정확히 그린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주르날 데 자티스트』
의 편집자는 “특이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사실적인 호랑이는 그릴 수 있지만, 인간다운 인간을 그린 적은
없다.”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 자신이 동물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색채의 힘에 대한 이해와 고양이과의 동물들에 대한 관심
이 과거 판화의 거장이었던 피터르 파울 루벤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사자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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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 사냥

들라크루아는 정부로부터 1855년의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 받았다. 그는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1840년대 후반부터 1850년대 초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사자나 표범의 사냥장면에
대한 관심을 작품에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870년 12월의 화재로 인해 위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남아있는 부분마저도 불길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좌측에 넘어진 말과 인물이 있는 부분의 배경이 상당부분 불에 그슬린 흔적을 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1854년 출간된 제라르의 책 《사자 사냥(La Chasse aux Lions)》에서 영감을 받았다.
제라르의 작품에서는 백인 사냥꾼들이 등장하지만, 들라크루아의 이 작품에서는 원주민들이 중심인 것
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라르의 글을 바탕으로 상상 속의 장면을 표현한 것이지만,
사자와 말의 해부학에 관한 철저한 연구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한편 주제와 구성적인 측면에서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 <사자사냥>
의 영향을 받았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의 풍부한 색채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부묘사에 감탄했으며,
특히 사자가 사람과 말을 끌어 내리고 그들을 밟고 올라 다른 사냥꾼들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부분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혼란스럽게 뒤엉킨 듯한 화면의 구성을 배제하였다.
루벤스의 <사자 사냥>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반면,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인물과 말들
은 앞다리와 팔, 다리로 캔버스의 가장 아랫부분을 안정적으로 딛고있다. 루벤스의 작품에서 역동적으로
뒤틀리는 느낌이 주를 이루었다면,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안정감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알제리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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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제리의 여인들

들라크루아는 당대 프랑스 아카데미에 팽배해 있던 구도와 이성적인 규칙에 충실한 다비드를 필두로한
고전주의적 회화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낭만주의 회화 사조의 대표자로 평가된다. 그는 단테, 세익스
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색채와 함께 극적인 구도를 활용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는 고전주의 회화가 간과하는 인간의 감정, 비이성, 그리고 무의식의 영역을 탐색하고 또
한 한 편으로는 현재와 거리가 먼 옛 고전이 아닌 당대의 현실과 감성을 반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알제리의 여인들>은 당대 아카데미의 미감과는 거리가 멀어 ‘회화의 학살’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들라크루아의 1824년 작 <키오스 섬의 학살>에서보다 색채의 명도와 심도의 대비가 강조되었다. 그의
양식이 확립되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7월 28일>
(1830) 등의 걸작들이 탄생한 그의 작업의 성숙기에 제작된 것으로 낭만주의 사조의 강렬한 색채, 극적
인 구도와 명암 대비, 그리고 격정적이며 역동적인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적 회화
는 드가와 르누아르 등의 후대 작가들에게 참조되었으며 회화 영역 외에도 문학, 음악등 문화 전반에 지
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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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1832년에 외젠 들라크루아는 외교 사절단의 기록 담당 화가 자격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를 방문했다.
6개월에 걸친 이 여행은 들라크루아의 미술 세계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그곳에서 접한 햇빛과 색채
덕분에 그의 팔레트가 더욱 환해졌고, 원래 감각적이고 호사스러운 이국 풍물에 관심이 많던 들라크루아
의 동방 취미가 이 여행으로 한층 증폭되었다.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은 그가 파리로 돌아온 후 북아프리카 여행의 추억을 되살려 그린 풍속화들
중 하나다. 들라크루아는 여행 중에 지인의 소개로 유대인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이국적인 풍속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듯 1832년 2월 21일의 일기에 피로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과 위치,옷의 색, 빛을 받아
환한 부분과 그늘진 부분, 심지어 어떤 사람의 목 위에 난 사마귀같이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묘사해
놓았다.

일기에 묘사된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이 그림은 결혼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넓은 홀에 모여 악기를 연주
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정경을 생기있으면서도 어딘지 나른하게 묘사하고 있다. 뚫린 천장에서 홀중앙으로
쏟아지는 환한 빛,난간 아래 그늘진 구석의 어둠을 강하게 대비시켜서 장면 전체에 깊이감을 더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를 비워놓고 벽을 따라 둘러앉거나 서있는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몸짓을 취하
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그림이 전체적으로 산만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위에서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부분을 비워놓았기 때문이다. 비어있음에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 공간은 일차적으로 정
면 벽에 기대어 앉은 악사들의 연주에 맞추어 막 춤을 시작하려 하는 무용수를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또
하나, 이 장면의 주인공이면서 그림에 부재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신부다. 신부는 어디에 있을까?  그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문, 창문과 함께 빈 공간은 그런 궁금증을 더욱 키워놓는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과 함께 1841년 살롱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누나, 레이몽 드 베르니낙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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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라크루아의 누나, 레이몽 드 베르니낙

다비드의 이 그림은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누나를 그린 그림으로 들라크루아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들라크루아는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은 갓난 아이에 불과했다. ‘아름답고 정숙한 헤라 여신’과 같은 미모로 칭송받았던 앙리에트
들라크루아는 1798년,  스웨덴과 콘스탄티노플 대사를 지냈던 35세의 외교관 레이몽 드 베르니낙과
결혼하였고 이듬해인 1799년 론느(Rhône) 지역 장관에 임명된 남편을 따라 리옹에서 살게 되었다.
이 그림은 1799년 그려진 것으로 다비드가 파리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베르니낙 부부가 리옹으로
떠나기 전에 파리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표현기법)
다비드의 초상화에서 베르니낙 부인은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배경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풍의 주름진 흰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베르니낙 부인이 입고 있는 옷은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신고전
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고대풍의 의상을 많이 그렸던 다비드도 이러한 고전주의 의상의 유행에
일조하고 있었다. 베르니낙 부인은 그림이 그려진 다음해인 1800년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당시에 이미 임신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분한 표정의 얼굴과 주름으로 가려진 옷아래의
몸에는 약간 살이 붙은 듯하다.

이때 태어난 아이, 샤를르 드 베르니낙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조카이지만 두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 평생
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베르니낙 부인의 조용하고 엄숙한 아름다움은 역시 다비드
가 그린 초상화 <레카미에 부인>의 쥘리에트 레카미에 부인과 종종 비교되며 각각 헤라 여신의 이성적인
아름다움과 아프로디테 여신의 관능미에 비유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젠 들라크루아의 누나, 레이몽 드 베르니낙 부인 [Madame Raymond de Verninac,
soeur d'Eugène Delacroix] - 자크 루이 다비드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마구간에서 싸우는 아랍 말 두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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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구간에서 싸우는 아랍 말 두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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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감상)
17세기 중후반 프랑스에 근대회화의 화풍을 열은 니콜라 푸생이래로 미술의 흐름은 바로크, 로코코
시대를 거쳐19세기 초까지 유럽전역에 새로운 고전주의가 풍미하게 되면서 이흐름은 들라크루아에
의해 낭만주의가 꽃 피우게되는 계기가 된다.

낭만주의의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와는 상반되는 역동성을 띄우며, 활발한 움직임과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힘을 표현하려고 한다. 형식적인 것 보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고,경직된 선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사물의 형태를 생생하게 표현하기위해 색채에 중점을 둔다.
비단 아름다운 것만을 그리지 아니하고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는 것이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들라크루아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최고의 화가로 불리고 있으며.
타고난 고집으로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그는 루브르 미술관을 찾아가서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면서 연구했고,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그곳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 감동을
받아서 인물화, 풍경화, 역사화, 벽화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대표작인 <민중을 이끄
는 자유의 여신>은 7월 혁명에서 민중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그림이다.강렬한 텃치로 감동을 주는
그의 작품은 매끈한 선과 형태 보다는 색채를 중요하게 여겼다.

일의(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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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이해> 근대미술

*낭만주의 (Romanticism A.D 19C 초)

간단히 말해 감성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전시켜 나간 형태라 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기
도 하고 이성의 규칙과 속박에서 벗어나 느낌에 따른 재현을 하였기 때문에 낭만주의로 불린다. 신고전주의
의 엄격함과 이상주의에 반발하여 직관과 상상력을 중요시했다. 전설이나 상상력에 의한 예술 표현을 추구
했고 강렬한 색채와 극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낭만주의는 전시대의 미술들이 버리지 못했던 현상이나 사물의 재현이라는 모방론적 입각을, 에술가의 감정
이나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론으로 바꾸게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술이 다양해지는 계기가 된다. 대표적
인 작가로 ‘메뒤즈호의 뗏목’을 그린 제리코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가 있다. 
 

댓글목록

작성자: 미리내님     작성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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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헬레나08님     작성일시:

잘 읽고 잘 감상했습니다
특히 보들네르의 감상평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