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공빈(共生共貧), 21세기를 사는 길'의 저자인 쓰찌다 다까시

작성자 : 미리내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9 10:40:19    조회 : 661회    댓글: 0

 

 

교토대학의 이공계 교수이자  '공생공빈(共生共貧), 21세기를 사는 길'의 저자인 쓰찌다 다까시(木追田?) 는 21세기의 당면한 삶에 대해 문명이 주는 풍요와 공생세계의 각성을 일깨우는 현대의 현인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가난해지지 않기위해서는  타고난 지혜의 본체, 양지(良知:양명학에서 말하는무지를 밝히는 인성)를 나타내고 실천해야한다고 합니다.회복을 위한 가치변화, '순환과 공생, 자립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가치가 중심되는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한 서평자는 공생공빈의 양지적 삶을 '결과를 예상할 줄 알며 전체관계성을 인지하는 인간의 능력'이라 하였고 예들어 '유기농이란 바로 양지가 실현된 인간의 삶의 모습'임을 서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먹거리를 기루고 키우는 농업이 양지의 업(業)과 같은 진실한 삶의 방편이라면
생명농업외에  유기농과 같은 공생공영(共生共榮)은 없는 것일까요?

문득 양지를 갖춘 생업,유기농과 같은  유익한 나눔의 생업이 있다면 이것이 공생공빈하는 공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즉 공생공업(共生共業)의 생업(生業)인 셈입니다.

살아가며 수많은 행사를 치르면서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게되고, 사업을 하며 좋은 제의를 받고 새로운 허다한 아이템들을 만나게 되고...,
만남과  만남, 사업과 사업들, 지금의 좋고 궂은 일들속에서 시간의 정각을 긋듯 활동과 생각들을 찰라, 딱 정지시켜보면, 공생공영할 소중한 일과 만남이 무릇 무엇이고 무릇 얼마일지를  계량해봅니다.
사실은 쭉정이와 부질없음이 더 많은게지요.

무지를 밝히는 인성, 양지가 발현되는 삶의 업(業)이 아니라면 과연 부질없기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고귀한 생명에너지가 낭비되는 일이 없는 몰두와 열정의 선택, 순환되는 지속성
활력의 생업을 공생공업(共生共業)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생공업하는 살림의 생업인 셈일 것입니다.
실패와 실수는 늘 있어온 것,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것
그러나 멈추지 않는 게으름없는 경작, 나의 양지의 실천이 멈추지 않을 때  공을 이룬 삶-성공(成功)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이 책은 견고히 뿌리내리는, 더욱 천천히 더욱 작게 그러나 견고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하 텍스트 내용은 자료 인용

 

 

  '공생공빈(共生共貧) 21세기를 사는 길'
1) 저자 : 쓰찌다 다까시(木追田劭)
(1) 저자약력 및 소개
1935년 교토시에서 출생
1958년 교토대학 이학부 화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을 거쳐 미국에 유학
1967년 교토대학 공학부 조교수(금속공학)
1979년 위의 대학을 사직, 이해부터 교토정화대학 교원(환경사회학)으로서 현재에 이름.
1973년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설립, 2001년부터 특정비영리활동 법인이 되어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여러 가지 실천활동을 통해서 ‘현대’를 생각하고 ‘미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2) 저서

공생의 시대, 파멸에 이르는 공업적 삶, 미래에 이어지는 농업적 삶, 미래에 사는 먹을거리를 구하며, 탈원발 공생에의 길, 자립과 공생(이상 樹心社), 공업사회의 붕괴(四季書房), 화학자 쓰찌다 류따로의 의견(共編, 化學同人社), 농의 재생 사람의 재생(人文書院), 걷는 속도로 산다 (太郞次郞社), 지구를 파괴하지 않고 사는 방법(岩波書店), 공감하는 환경학(共編 미네루타 書房), 물과 삶의 환경문화 (共編, 韶和堂 書房) 등.

 


2) 역자 : 김 영 원

 

(1) 역자소개

이 책을 옮긴 농민 김영원은 1930년 경북 의성 효선리에서 출생하여 13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고 있다. 5대째 기독교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으며 33세에 효선교회 장로가 되었고 63세에 은퇴하였다.

1978년도부터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농사뿐 아니라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등에 꾸준히 참여해왔다. 지금은 큰 아들(김정욱 - 현 의성군 농민회 회장)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다.

오랫동안 파킨슨씨 병과 투병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추구하며 실천해 오고 있다. 한국기독교농민회 전국회장, 유기농업실천협의회 회장, 정농회 이사, 한살림생산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저서

효선리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종로서적), 효선교회 100년의 숨결-평신도의 교회사(기독교서회), 농민예언자 김영원의 들소리(흙과생기), 눈 뜬 장님 밥상(소나무) 등이 있다.

(3) 추천의 글 - 이현주 목사

이 책을 옮기신 김영원 선생께서 번역원고를 보내시며 추천하는 글을 부탁하셨을 때, 낯익은 저자의 글이니 한번 읽고 대강 소감을 적으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뭐랄까, 어떤 ‘성스러움’ 앞에 갑자기 세워진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글은 평이했고 번역도 순조로왔지만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저자의 글보다 그의 삶이 나 같은 글쟁이로서는 감당하기 벅찰 만큼 진솔하고 엄정해보였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저자가 쓴 『공업사회의 붕괴』를 처음 읽었을 때에도, 이 사람 혹시 전형적인 사무라이 혈통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생각과 생활의 가차없는 하나됨에 놀랐거니와, 그가 신소재를 연구하는 금속물리학 교수직을 내놓고서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길거리 폐지를 줍기 시작한 지 30여 년 되는 오늘, 2000년을 전후하여 10년 간 발표한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을 읽자니 역시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생각을 삶으로 실천해낸 발자취가 크게 돋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래서 쉽게 읽어 내려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동안 이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고맙다. 인류가 파멸로 가는 막다른 길을 끝내 고집하여 마침내 지구별이 폐허가 된다 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지금껏 말해온 공생공영(共生共榮)은 더 이상 무리(無理)이고 남은 길은 오직 공생공빈(共生公貧)에 있을 따름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같은 지구상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을 산 셈이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같은 심정이었을까? 30년 전에 하던 ‘비관적이고 무거운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면서도 전보다 많이 부드럽고 가볍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그가 사회변혁운동을 하면서 아울러 착실한 자기수행의 길을 걸어왔다는 증거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오랫동안 독재와 투쟁한 사람들 가운데는 어느새 독재자를 닮아 그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투쟁하면서 자기가 투쟁의 상대방에 닮아간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챈 것이다. 이는 부단한 자기성찰을 게을리 한 결과라 하겠다.

아무리 보아도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현실에서 그것을 바꾸려는 사회변혁운동에 한평생 몸담아 살았는데도 나이를 먹으면서 전보다 더욱 밝고 희망적인 사람으로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사회변혁운동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다. 제 속이 먼저 뜨겁지 않고서야 어찌 남을 덥혀줄 수 있겠는가? 낙담과 절망에 사로잡혀 만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무슨 수로 세상을 밝게 할 수 있겠는가?

붕괴되는 과학문명 속에서 그것을 한평생 증언해 온 과학자가 쌓이는 연륜과 함께 오히려 더욱 밝고 가벼운 표정을 보여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참 좋은 선물이다.

더군다나, 이 책을 한글로 옮긴 김영원 선생 또한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에 파킨슨씨 병으로 떨리는 손을 수습하여 한자 한자 옮기셨을 것을 생각하면, 독자들은 내가 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고 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하실 것이다.

 

정치외교적으로 한ㆍ일관계가 잔뜩 어색해진 요즘, 참된 인생의 길을 ‘농(農)적 질서의 회복’에서 찾아온 한국의 한 농부와 일본의 한 과학자가 17년 간 맺어온 우정의 결실로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책을 선물한다는 사실 자체가, 공생공영이라는 거짓말로 병든 이기욕(利己慾)을 채우는 두 나라 백성들에게, 나아가 인류 전체에게, 하늘이 내리는 희망(또는 절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3.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소개

“1970년대 초, 석유 쇼크 이후 재생 불가능한 지하 광물자원에 의존하는 현대 공업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깨닫고 그 필연적 붕괴를 예견하면서 금속공학자로서의 길을 버리고 넝마주이가 되어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설립하여 일본의 환경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공업, 과학 문명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맹목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죄라는 사고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주체적 선택을 하였고, 자연에 순종하며 즐겁게 사는 삶, 공생공영이 아니라 공생공빈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참 용감한 분이다.”(정 세라피아 수녀,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매일성서묵상 2006년 2월호)

 

 

 

서평 / '공생공빈(共生共貧), 21세기를 사는 길'을 읽고 (이정배 감신대 교수)

김영원님이 번역하신 위 책을 전해 받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병환 중임에도 사명감을 갖고 생의 마지막 불꽃을 들어낸 작품이라 생각되어 숙연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책의 내용도 좋았으나 읽는 내내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는 장로님의 모습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장로님께서 농촌에서 일군 80평생의 삶이 “共生共貧”의 저자 쓰찌다 다까시의 것보다 더 아름답고 순박하며 깊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공과대학 교수직을 마다하고 해박한 이론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공동체를 일구고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이끌어 낸 저자의 지속적 노력이 독자들의 마음에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동일한 시대에 견원지간인 한일 양국에서 태어나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평생을 살아 온 두 분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시대에 예언자적 양심을 보여준 이 분들의 삶, 이들이 꿈꿨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과 결단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서평을 시작하겠습니다.

 

생태학자들은 21세기 문명의 화두로 단순성(simplicity)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듯 지난 세기는 자유와 진보를 상징하는 청색이념(자본주의)과 평등가치를 지향하는 적색이념(공산주의)간의 갈등과 투쟁의 시기였지요. 그러나 이 싸움에서 적색 이데올로기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 이념이 지구화(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세계지도를 청색 하나로 물들여 가고 있습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세계 경제를 효율적 구조로 재편하여 모든 나라를 잘살게 만들겠다는 수사학이 신문지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한일 양국의 농업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을 붕괴시키는 양극화가 국가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 문제로 확장 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 비판가들은 성장과 분배 간의 우선순위 논쟁이전에 단순성이 미래를 위한 대안적 가치임을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장은 물론이고 분배 역시도 ‘단순성’의 가치를 전제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후 문명이 단순성, 곧 최소한의 것으로 살려는 정신적 가치를 실험치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지에 뿌리를 내리며, 더욱 천천히, 더욱 작게’를 말하는 쓰지다 다까시의 책 “共生共貧”은 세계의 문명비판가들의 논지와 일치되는 일종의 문명비판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기위해서는 더불어 가난해야 한다는 저자의 대안적 사고는 절망의 시대에 종교나 민족의 차이를 넘어 인류모두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입니다.

 

본 책은 서장을 포함하여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은 무거운 학문적 내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자의 생활 반경 속에서 체험된 자연환경, 농업의 문제, 삶의 가치, 계절의 변화 속에서 느꼈던 지혜 등이 솔직 담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비교적 5장의 글들이 오늘의 환경위기가 기독교 서구의 세계관과 그들의 삶의 방식에 연유되어 있음을 밝히는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인상적인 것은 시민을 소비자라 칭하며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시대에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1973)하여 검소와 느린 속도를 찬양하는 생명문화 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입니다. 소비를 미덕으로 만드는 공업 문명의 시대는 필히 멸망한다는 것이 저자의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인식이었습니다. 인간을 욕망덩어리로 만들며 리사이클링을 거부하고 진보만을 선으로 인정하는 산업문명은 엔트로피 2법칙에 근거 필히 파경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공과 대학 교수였던 저자는 동시대인들에게 ‘전문바보’라고 조롱을 받기도 했지요. 그럴수록 저자는 자신의생활 반경 하에서 파국적 문명을 고칠 수 있는 방식을 찾기로 작정합니다. 본 책이 의미 있는 것은 거대한 생태담론이나 문명비판 이론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 맞닥트린 저자의 치열한 삶의 경험 때문이지요. 특별히 저자는 불교적 가치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바, 불교의 諸行無常을 현실(문명)비판의 토대로 이용합니다. 또한 자연을 부처님으로 알고 자연의 뜻에 따르는 삶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으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자연을 부처님이라 부릅니다(自然法爾). 저자가 유기농업을 하고 단식을 즐기며 一物全體食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21세기를 진단합니다. 풍요 문명에 눈감기 어렵지만 그것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현실도 숙지시키고 있습니다. 오히려 문명의 폭력성을 부각시켜 냅니다. 산업 문명은 종의 다양성을 파괴하기에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하는 共生의 세계를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돈(물질)을 숭상하는 금주주의(金主主義)는 자원 낭비를 자초하며 생태 환경 전체를 오염시키는 바, 급기야 물 부족은 식량 자급률을 떨어트리고 농업을 붕괴시키며 인류 전체를 굶주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예상하는 21세기의 모습이지요. 이로부터 저자는 공생세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 良知의 발현을 기대 합니다. 결과를 예상할 줄 알며 전체관계성을 인지하는 인간의 능력 말입니다. 이점에서 유기농이란 바로 양지가 발현된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광우병이 생겨 인간이 위태롭고 환경 호르몬으로 인류 미래가 불투명해지며 아토피로 인해 신생아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의 탈출구는 共生共貧, 곧 인간의 자연됨을 위해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길 밖에 없음을 저자는 강변합니다. 그래서 농업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아미쉬 공동체의 삶을 인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 보입니다.

2장에서 저자는 자신이 엮어 낸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신중하게 만들고 귀중하게 사용하며 함부로 버리지 않고 오래 사용하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비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를 함께 생각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손의 창조력에 근거하여 자급자족하는 삶의 형태를 소개합니다. 된장과 메주를 직접 만들어 먹고 가금류에서 알을 얻으며 상호 협력하여 쌀농사를 지켜감으로 금(金)주주의를 넘어 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페스트 후드가 아니라 슬로우 후드를 먹는 즐거움과 건강을 찬양합니다. 자연을 지키고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가 인간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간의 협력과 협조를 말합니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는 물질만이 아니라 인간 역시도 쓰고 버리며 살고 있으나 저자가 조직한 모임에서는 세상 화폐대신 공감과 상부상조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지역화폐를 쓰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바,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 시키며 인간간의 공감을 회복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하여 저자는 자연에서 얻은 지혜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갈 것을 말합니다. 효모 빵을 굽고 산야초를 만들며 널려진 잡초에서 허브 차를 얻고 그 나머지는 자연으로 돌려 쓰레기 없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여 원자력으로부터 자유 할 길을 모색합니다. 오끼나와를 미국에 넘겨주고 댓가로 얻은 도시 문명을 되돌려 주고자 합니다. 강한 군대를 지향하는 정부 정책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것도 저자의 일이지요. 최대의 환경파괴를 가져오는 것이 전쟁임을 아는 것이지요. 대량 유통에 의한 먹거리를 거부하고 합성세제를 사용치 않으며 자작하여 먹고 마시는 문화 역시 그의 몫입니다. 대량 생산된 먹거리는 농약으로 키워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종이소비를 문명의 척도로 여기는 것도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보가 인간을 삼켜버리고 자연을 먹어치우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먹고 남아 쓰레기가 되는 먹거리를 거부하고 가능하면 국물이 없는 조리법들 권장합니다. 땅을 돈의 가치로 보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경계 역시 철저합니다. 저자는 올바른 먹거리 생산을 위해 비영리적인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것을 21세기를 사는 방법이라 합니다. 良知의 소리에 따라 이산화탄소 줄이는 삶의 구체적 방식을 구현하라는 것이지요. 좋은 환경, 좋은 땅, 유기농 그리고 좋은 먹거리 생산을 위해 인간 삶의 방식 및 가치관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J.리프킨이 말하듯 엔트로피 밥칙을 따르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갖고 살기를 힘썼던 저자는 과학자의 딜렘마를 적시합니다. 실험실의 연구만을 전부로 알고 연구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무지한 과학자 집단을 비판합니다. 과학자로 활동하면서 공업사회의 멸망을 주창하는 자신의 처지를 괴롭다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전문바보라 칭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감수하려고 했습니다. 낙엽을 썩혀 퇴비를 만들고 그것으로 흙을 살리고 텃밭을 활용하여 필요한 채소를 얻으며 그곳에서 자라는 무수한 벌레들의 삶을 보고 그들과 생명의 교감을 나누는 일들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조합을 만들고 운동으로 이끌어 내는 지도력도 발휘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이런 삶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자연관(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고베 지진에서 번영의 정점에 선 문명 파괴의 전조를 보며 오히려 그것을 하늘의 계시라고까지 수용하며 삶의 모형변이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기술, 이것이 인간 위주의 이원론적 토양을 지닌 기독교 서구의 산물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최근 유전자 조작과 같은 폭압적인 인간의 자연 지배는 풍요에 취해 인류의 미래를 눈감게 하는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문명화의 결과로 세계의 녹지가 사막화되어가는 현실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비관적으로 이끕니다. 서구 기독교에 근거한 인간 우위적 자연관으로부터의 이탈만이 희망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동양적 자연관으로 과학기술적 자연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人爲를 버리고 必然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無爲自然, 곧 ‘저절로 그러함’ 의 세계를 긍정하는 지혜가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21세기의 화두인 단순 소박함과 비폭력성이 이로부터 비롯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목적지향(인위)적인 과학기술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자연은 진실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다음의 서구 생태학자들의 의견과 일치됩니다. “...모든 생물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고 자유롭게 발전될 수 있는 잠재력, 인간의 잔인한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권리, 종의 생명력 유지에 필요한 자연을 공정히 분배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저자는 노장의 무위자연 뿐 아니라 불교 역시도 부처가 비인격적 자연 그 자체와 동일시 할 정도로 일체 생명의 행복과 가치를 전해준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자력이 아니라 자연의 타력, 곧 무위자연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생명세계가 유지, 존속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有爲가 자연의 無爲로 방향지어 질 때 인류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지요. 성서 역시도 유사한 제안을 합니다. 지금 고통받고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저자는 생명을 직조해 내는 자연의 예정 조화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에 인간이 자신의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자연의 타력이란 말을 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의 타력을 믿는 기독교와 달리 자연의 타력(무위자연-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자연)을 믿는 것이지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이토록 안정된 생명공간을 일궈낸 자연에 대한 신뢰가 대단합니다. 이런 자연에 따라, 이런 자연을 도와 사는 것이 인간과 사회와 우주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하지요. 의사나 약에 의지하지 말고 인간 몸의 자연치유력을 강조하며 먹이사슬구조의 아래 단계를 먹고사는 것이 자연스런 것임을 말합니다. 이 역시 “쇠고기를 넘어서”의 저자 리프킨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육식을 줄일 때 인류의 불평등 구조가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 인류는 역설적으로 원시감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많이 걸으며 몸을 움직이고 무공해 유기농으로 재배한 곡물 채소를 먹는 소위 웰빙문화도 사실 원시감각을 회복코자하는 현대인들의 역설적 사고방식의 표현 일 것입니다. 저자는 유기농을 노장적 무위자연의 경작법이라 명명하는 바, 좋은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유기농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자연농법과 유기농법의 차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대상이 되어 온 자연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방임과 다르지 않기에 자연 농법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무위를 이상으로 삼는 인간의 인위야 말로 현실적 대안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 극단의 자연주의자들과는 변별력을 보여 줍니다. 자연에 순응하려는 인간의 인위를 긍정하는 점에서 저자의 논지는 동서양 공히 소통될 수 있으며, 기독교/불교를 막론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희망이란 것입니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히듯 오늘 우리 시대는 쓰고 버리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며 않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비를 부추기며 과도한 생산을 발전이라 여기는 현실에서 과학자인 저자는 스스로 전문 바보가 되어 인류에게 원시감각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에너지와 자원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죄악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검소와 검약의 가치를 비웃고 농촌문화를 홀대하며 도시의 위대함을 찬양한 현대 문명은 카인의 후예들의 삶이며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카루스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이 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기독교·불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통 과제는 저자가 제시한 가치관을 갖고 바보의 길을 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시대의 진정한 구원의 길-녹색구원-일 것입니다.‘더불어 가난하게 살자’는 저자의 말은 최소한의 물질로 살자는 러시아사상가 베르자이에프를 상기시킵니다. 이 말을 하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 사람에게 구원(녹색구원)이 선사될 것인 바, 우리의 소망은 그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2006. 3. 10)

 

위의 내용은 한국기독교생명농업포럼의 보도자료를 전재한 것입니다.

 

ad_자료

생명가치가 중심되는 농업과 삶

http://21.new21.net/technote/read8.cgi?board=environ&y_number=190&nnew=1

 

이제껏 우리는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질주해왔다. 그 결과 자연생태계의 파괴, 인간성의 소외, 공동체성의 와해 등으로 설명되는 현대산업문명의 위기와 한계가 날로 심화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공해와 환경파괴로 인한 재난은 더 이상 지속적 성장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가? 우리 삶의 중심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제 이 질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의 물질중심, 돈 중심의 가치에서 순환과 공생, 자립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가치가 중심되는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환경문제에 대한 단순한 유행적 이슈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전체의 생존에서부터 지구환경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순환과 공생, 자립을 소중히 여기는 생태적 삶의 모습을 실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절박한 일이라 생각된다.

21세기는 공업번영의 성장시대가 아니라 순환과 공생, 자립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가치와 그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 자연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자연의 소리를 잘 들어면서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기본으로 삼을 때 새 천년의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21세기가 농업이 중심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새로운 세기가 생명가치가 중심되는 사회로 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생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농업(유기농업)과 이에 바탕을 둔 삶의 양식만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삶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의 필요성, 농업의 의의와 중요성 망각, 공해시대의 개막과 먹거리의 안전성 위협, 생명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생명살림 농업으로서의 유기농업 등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본다.

 

농업의 의의와 중요성 망각

지난 70년대 심각한 결핍상태와 배고픔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아래 공업입국, 수출입국 건설에 모든 국민이 합의하고 오로지 성장과 편리함을 위해 폭주해왔다. 즉 70년대 조국근대화의 명분아래 물욕에 모든 국민이 자의든 타의든 합의한 것이다. 여기에 위험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생각이 똑 같기 때문에 그 함정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양성이 있는 곳에서는 그 차이와 모순을 통해 상호이해와 반성이 일어나지만, 모두가 일치하는 곳에서는 착각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 일어나기 어렵다.

1970년대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돈으로 움직이는, 돈이 중심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맹렬해지기 시작하였다. 돈으로 움직이고 돈이 중심되는 세상이 되면서 기술혁신의 합리화가 진전되고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윤이 이윤을 내는 확대성장에 세상은 들끓게 되었다. 근로자의 소득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쓰고 버림은 미덕, 소비자는 왕'으로 미화되면서 쓰고 버림을 계속 부추키고 경제성장과 공업번영의 길로 매진하였다.

해외로부터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공업제품을 만들어 해외로 수출하였다. 그 대가로 벌어들인 외화로 공업원료 뿐만 아니라 식량 수입을 계속 늘려왔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이 낮은 농업은 헛되고 소용없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버렸으며, 생산성이 높은 공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경제성장과 번영을 실현하고 값싼 식량을 해외로부터 수입한다는 것이다. 국내에 없는 물건을 수입만 한다면 모르지만 우리들이 매일 먹고 있는 먹거리의 대부분을 해외로부터 들여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 및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70년대, 공업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농공 소득격차에 제동을 걸기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 등 합성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하고, 농기계를 적극 도입하여 생력화하고, 시설원예농업으로 나아가고, 돈이 되는 작목중심의 선택적 확대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농정방향이 설정,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농업의 속성상 경제효율과 생산성만을 지향하는 시장원리와는 친숙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큰 무리가 따르고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움직이는, 돈이 중심되는 세상이 되어 생명의 젖줄인 농업의 의의와 중요성를 잊어버렸다. 이것은 그만큼 먹거리의 안전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돈이 되지 않는 농업에 더 이상 꿈과 희망을 맡기지 않는 분위기가 농촌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농과 겸업은 계속 늘어만 가고, 결국 농업을 계속할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식량자급율이 30%에도 못미치는 참담한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공해시대의 개막과 먹거리의 안전성 위협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생명의 위기, 생존의 위기가 다가왔다. 즉 공해시대의 막이 열렸던 것이다. 여러 가지 공해사건이 환경·생태계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 돈으로 움직이는 돈이 중심되는 사회에서는 각종의 환경오염(수질오염, 대기오염, 식품오염, 토양오염 등)도 사람들의 불행도 무시되고, 공해범죄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되돌아왔다.

더욱이 돈 중심주의로 인해 생명가치가 경시되고 먹거리가 상품화 되었다. 먹거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먹거리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어렵고 지역범위에서 생산, 소비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오래 되어도 썩지 않도록, 변색되지 않도록, 맛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합성보존료, 착색료, 감미료, 산미료 등 각종 식품첨가물이 필요하게 된다. 오감을 속이고 세균에게도 먹히지 않는 것으로 되었다. 안전하다고 사용이 허가된 식품첨가물이라도 그 후 발암성, 유전독성, 최기형성, 간장독성, 생식장해 등 무서운 위험성이 밝혀지고 사용금지된 것이 속출한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식품첨가물도 불안하다. 돈으로 움직이는, 돈이 중심되는 사회에서는 이같은 위험성을 알고 조심하지 않으면 건강을 손상받을 지도 모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