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12. 제2장 - 4 보편적 친교와 재화의 공동 목적 예수님 눈길로

작성자 : 마태오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14 10:08:20    조회 : 321회    댓글: 0

자연 및 사회 생태계를 착취하는 이들을 묵인할 것인가?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회칙은 다음과 같이 ‘친교’의 차원을 확장한다.

1. 모든 피조물이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 이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89항 참조). 하느님께서 주인이시라는 이 확신은 다른 피조물을 책임 있게 대해야 마땅하며, 더더욱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엄청난 불평등에 대해 특별히 분노해야”하는 근거가 된다(90항).

회칙은 묻는다. “실천적으로, 우리는 분노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계속해서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그들이 더 위대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듯이 말이다(90항).

2. 그러면서, 회칙은 현재 환경 운동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신매매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혹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을 하면서, 위험에 내몰린 [동식물] 종들의 거래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91항).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 문제를 풀겠다는 확고한 투신’은 결합되어야 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이 보편적 친교는 환경,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3. 마침내 회칙은 “평화와 정의와 창조 보존은 확실히 상호결합되어 있는 세 주제”라고 천명한다.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형제인 태양과 자매인 달과 형제인 강과 어머니인 대지(92항)와 곧 모든 가족을 결합시키는 ‘보편적(우주적) 친교’의 힘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1.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생소한 교회의 오랜 가르침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다. 우리에게는 철두철미 재화의 사적 소유와 임의의 처분 권리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적 재화의 권리(사유 재산권)를 절대적이며 불가침하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사적 재화가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교회 가르침은 적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오히려 “부당한 습관들”이야말로 능력으로 칭송받는 형편이다(93항). “인간의 권리들을 존중하지 않고 증진시키지 않으면서” 경제적 성장만을, 그것도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발전’이라고 내세우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연스럽지만, 회칙은 이를 “가치 있는 것이 못 된다”고 비판한다(93항).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창조주께 대한 충실성”(93항)을 의심해봐야 한다.

2. 회칙에서 어쩌면 도발적으로, 혹은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몇몇 대목 가운데 하나가 이 자리에서 발견된다. 회칙은 뉴질랜드 주교들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가난한 나라들과 미래 세대들한테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강탈하는 그 비율로 세계 인구의 20%가 자원들을 소비하는” 이때 “너는 살인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95항). 이 대목은 “우리는 생산된 식량 가운데 거의 1/3가량이 내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량이 버려질 때마다 그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서 식량을 훔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50항)의 다른 표현이다. 굳이 설명과 성찰이 필요 없다. 어찌 “고통스러운 자각”(19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VII 예수님의 눈길로(96항-100항)

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강조하셨으며(96항),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하셨으며(97항), 창조(삼라만상)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사셨으며(98항) 인간의 노동을 거룩하게 하셨다(99항).

예수님의 삶에서 “건전치 못한 이원론”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건전치 못한 이원론을 펼쳤으며 복음을 왜곡했다”(98항). 우리의 경우를 보자. 우리는 “세상의 육신과 세상의 일과 세상의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정작 실제로는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어떻게 사람과 자연과 사회와 세상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함부로 다뤄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제1장) 태연하거나 회피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러운 자각이 없고 그 자각을 인격적으로 변환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불신앙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창조 범위 안에 있고”, “자연과 창조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6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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