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생태 회칙 <찬미 받으소서> 해설 19- 제 4장 통합의 생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12-05 13:21:34    조회 : 316회    댓글: 0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19. 제4장 - 통합의 생태 ② 생태의 문화 요소
2015. 11. 29발행 [13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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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4장 - 통합의 생태 ② 생태의 문화 요소


“문화적 정체성은 오랜 시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 구조들은 생활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지역 공동체의 깨달음을 구체화한 것들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식물이나 동물의 한 종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145항).

우리는 ‘문화’라는 말을 흔히 ‘예술 분야’ 정도에 제한하여 사용하려 한다. 대중매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대중매체가 ‘문화’를 소개할 때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이나 미술, 책이나 전시회 등에 관한 것이다. 이때도,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영향을 주는 프레임이 빈번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구별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차별을 구조화한다.

그에 따른 폐단은 심각하다. 서열화를 가져오고 우월과 열등을 내재화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사회의 ‘예능인’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대중을 향한, 혹은 대중에게서 분출된 예술을 가볍게 여기려 한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와 관련한 논란에도 그 같은 일부 집단의 우월적 태도가 반영돼 있다. 노동자와 시민의 삶을 이끌어 왔던 그 역동성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고,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이나 ‘거창한(?) 사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시끄러울 뿐이다. 일제 강점, 한국전쟁,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땅의 평범한 시민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역사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생태가 갖는 문화 요소: 교종은 ‘문화’를 그렇게 좁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문화는 한 공동체 안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회(공동체)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그 관계를 어느 특정 공동체가 특정 시기에 구체화시킨 것, 그것을 문화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문화의 아버지(어머니)이며 동시에 문화의 아들(딸)이다. 그래서 회칙은 ‘자연’이 일종의 세습 재산이듯이, 문화 역시 ‘세습 재산’이라고 밝히면서, 그 세습 재산이 지금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우려한다. “문화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상의 무엇입니다. 문화 역시 무엇보다도 살아있으며, 역동적이며, 참여적인 현재의 실재입니다. 문화는 우리가 인간과 (자연, 사회) 환경 사이의 관계를 재고할 때 배제해서는 안 될 실재입니다”(143항).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문화라는 실재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증세는 문화의 ‘평준화’, 문화의 ‘획일화와 다양성의 약화’, ‘문화적 정체성 파괴’다. 삶의 생생함도, 역동성도, 참여성도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면 문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회칙이 꼽는 인간적 원인은 ‘세계화된 경제 장치들이 조장하는 소비주의의 관점’과 ‘획일화된 규제와 기술적 개입들’이다(144항).

사실 우리는 문화의 황폐함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문화를 예로 살펴보자. 정치는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시킴으로써 공동선 실현을 위해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함이나 공동선이나 올바른 질서라는 숭고한 가치는 실종되고 오로지 ‘돈’과 맺은 관계에서만 바라보라고 내몰고 있지 않은가?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은 존중하고, 돈이 드는 사람은 배제하려 한다. 선과 악의 식별 노력은 실종되고 특정 집단의 경제적 이익만 득세한다. ‘윤리 도덕적 질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제적 이해득실’만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수 십 년 전 이웃 나라 시민을 ‘경제적 동물’이라며 손가락질 한때가 있었다. 그 손가락질은 지금 어디를 누구를 겨냥하고 있을까! 시민 가운데 누구도 그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고 있을까?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까?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일까? 아니다. 누군가 혹은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한다. 회칙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을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보도록 부추깁니다(혹은,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소비’의 관점에서 보도록 부추깁니다)”(144항).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자연과 그리고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돈’의 관점으로만 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관계 양식으로서의 우리 문화를 두고, 건강한 문화라고 해야 할까? 병든 문화라고 해야 할까? 만일 병든 문화라면, 우리는 그 병을 치유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치유하지 않는다면, 더 중한 병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자되는 ‘금 숟가락과 흙 숟가락’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재기발랄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는 쓰고 버리는 소비재가 아니라 세습 재산이다. 당연히 물려줘야 할 실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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