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받으소서 - 해설 31-새로운 생활 양식과 교육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3-03 10:35:33    조회 : 320회    댓글: 0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31.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①새로운 생활양식과 교육
 
2016. 02. 28발행 [13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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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새로운 생활양식과 교육


“어떤 물건을 즉시 버리기보다는 재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뜻을 갖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일 수 있습니다”(211항).


지난 2세기에 걸쳐 인류는 지배자이며 주인인 양 우리의 공동 가정을 마음껏 착취하여 황폐화시켰다. 그 무모함은 인류를 마침내 십자로에까지 데려왔다(102항). 그 십자로에는 경로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없고, 인류에게는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 없다. 우리는 이정표를 마련하고 나침반을 찾기 위해서 일단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태도 자체를 재조사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기초적 자각”의 회복이며 “문화적이고 영적이며 교육적인 거대한 도전”이라고 한다(202항).

환경의 타락은 우리에게 생활양식을 재조사하라는 과제를 안겨 준다(206항). 교종은 그 한 사례로 “과학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쫓는 소비주의”를 꼽는다. 소비주의가 낳는 것은 “경제·금융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극소수”의 거짓 자유와 대다수의 자유 박탈과 정체성 상실이다(203항). 이는 “집단적 이기심”을 불러오고 “탐욕”을 키움으로써 더 많은 구매와 소유와 소비를 갈망하게 만든다. 이 집착적 소비주의 생활양식에서는 “공동선에 대한 참된 의식”을 찾아볼 수 없고 “사회 규범조차도 개인적 욕구들과 충돌하지 않는 한도까지만”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불안”과 “폭력과 상호 파멸”을 야기한다(204항). 회칙은 이런 소비주의를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이라고 한다(208항).

우리는 자기 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극복하고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된 진선미를 향한 개방성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 우리는 선한 것을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다(205항). 이 생활양식의 변화는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압력이 될 수 있다. 그 예로 교종은 ‘특정 상품 불매 운동’이 기업의 생산 방식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소개하면서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소비 생활의 도덕성 회복을 강조한다(206항). 이렇게 우리는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들을 일으킬 수 있다”(208항).

‘다른 생활양식’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새로운 습관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관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서 교육 차원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209항 참조). 교종은 ‘생태 시민 의식’(211항)을 고취하려는 환경 관련 교육이 그 목표를 넓혀 왔음을 주목한다. “과학적 정보 제공과 의식 고취와 환경 재앙 방지”에 중점을 두었던 교육이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근대정신의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 영역을 확장했으며, “다양한 수준의 생태적 평형 상태 회복”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고 환영한다. 그러면서도 교종은 생태 윤리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그 ‘초월자’를 향한 도약을 촉진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며, 그 생태 윤리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210항).

법과 규제만으로는 “나쁜 행실의 경로”를 바꾸는 데에 충분치 않다. ‘생태 시민 의식’을 갖고 좋은 습관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심 없이 생태의 삶에 투신할 수 있으려면”, 훌륭한 덕을 계발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교종은 ‘환경에 대한 책임 교육’이라고 부른다. 이 교육은 “더 많이 지출하고 소비할 수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난방을 덜 하고 대신 따뜻한 옷을 입는” 습관처럼,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을 장려할 수 있다. 이런 좋은 습관(덕행)은 고상하고, ‘창의력’을 드러내며, ‘고유한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이다(211항). 그런 행동들은 세상에 ‘미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며, 지상의 삶이 값지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212항).

우리 자신을 성찰한다. 우리는 교육 영역을 포함하여 사회 각 영역에서, 공동체적이며 이타적인 ‘생태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생활양식 대신에, 자기중심과 자기 몰두의 개인주의 생활양식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 우리의 왜곡된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생활양식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 땅의 종교가 지나치게 이기적이며 기복적인 성향, 곧 개인주의 신앙에로 퇴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개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교회에는 ‘생태 윤리’를 개발할 역량을 갖춘 교육자들은 있는가? 교회는 주변 세상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영향을 주는 행동 방식들의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더 많은 지출과 소비를 과시하는 양적 팽창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생태의 윤리’ 교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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