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받으서서 - 해설 35 그리스도교 영성, 성사의 표지들과 쉼의 기념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4-19 11:54:51    조회 : 351회    댓글: 0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35.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⑤그리스도교 영성, 성사의 표지들과 쉼의 기념

 
2016. 03. 27발행 [13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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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성체성사)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적입니다(cosmic)! 성찬례가 어떤 비도시 교회의 초라한 제대 위에서 거행될 때조차도, 언제나 세상의 제대 위에서(세상이라는 제대 위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236항).

 

교종은 인류가 직면한 생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영성으로서 회칙은 ‘관상’과 ‘성사’와 ‘주일’의 영성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상’과 ‘성사’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관상’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느끼는 정도로, ‘성사’는 ‘성당’과 ‘주일’이라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교회의 규정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사랑에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차원’과 ‘사회·정치적 차원’이 있다고 믿는다. 관상과 성사도 그와 유사하다.

교종은 “[우리의] 이상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하기 위해 외부에서 내부에로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all things)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그 길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교회는 ‘관상’의 삶을 제시한다. 참된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 은총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다 더 많이 느끼는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보다 더 잘 배우는 것을 심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뭇잎 하나에는, 산자락 하나에는, 이슬방울 하나에는, 한 사람의 사회적 약자의 얼굴에는 발견되어야 할 신비로운 의미가 있다”(233항).

그렇게 ‘우리 자신 밖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연을 채택하셔서 초자연적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게 물질적 우주의 모든 창조물은 사람이 되신 말씀(the incarnate Word)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사들은(the Sacraments) 그 초자연적 생명의 전달을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가하신 길이다. 그러므로 “물과 기름과 불과 빛깔들”은 ‘성사적 표지’로서 그 상징적 힘과 함께 우리의 흠숭지례(성사)에서 통합된다. “축복하는 [사람의] 손은 하느님 사랑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며, [이 세상에]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반영한 것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자연과 물질의 배척’나 ‘육체의 부정’이 자리할 곳이 없다(235항).

창조된 그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로 들어 높여지는 때는 바로 성찬례(성체성사)에서다. 바로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당신의 창조물을 위한 음식으로 내주셨기 때문이다. 첫째, [이제] 그분께서는 위에서 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그분을 모신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신다. 둘째, 이제 우주 천지만물은 성찬례에 현존하시는 육화하신 아드님과 결합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올린다. 셋째, 실제로 성찬례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활동이다. 넷째, 성찬례는 모든 창조를(삼라만상을) 껴안고 관통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환경에 관한 우리의 관심에 빛을 비추고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되며, 모든 창조(삼라만상)의 청지기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236항).

그러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이해할까? 주일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날만도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일의 의미는 훨씬 심오하다. 첫째, 주일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날”이다. 둘째, 주일은 “주님 부활의 날로서 새 창조의 ‘첫 날’이며 창조된 모든 실재가 도달할 최종 변모에 대한 보증”의 날이다. 셋째, 주일은 ‘관상적인 휴식’의 날로서 ‘노동의 의미’를 완성하는 날이다. 넷째, 성찬례에 중심을 둔 이 관상적 휴식의 주일은 “다른 모든 것에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인간적 소득을 찾게 만드는 그 고삐 풀린 탐욕과 고립감을 막아준다. 다섯째, 노동을 금지하는 주일은 다른 존재들의 권리에 대해 새로운 감수성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주일은 한 주 전체에 빛을 비추고, 우리에게 자연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찾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237항)

우리 사회와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내 욕심대로 거칠게 다룬다. 그 모든 창조물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신비로운 의미’ 혹은 ‘하느님의 흔적(사랑과 정성)’을 찾아내려는 경외의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 생활에서조차 관상의 기도와 성사생활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형식적 규범의 준수쯤으로 환원되기 일쑤다. 주일의 삶은 ‘주일 미사 참례 의무’ 정도로 대치되거나, 그 의무 이행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무자비한 ‘노동’의 짐을 강요하고 강요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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