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받으소서 해설 - 36 생태 교육과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4-19 11:58:50    조회 : 313회    댓글: 0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36.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⑥그리스도교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36.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⑥그리스도교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성가족’과 ‘공동의 가정’, ‘새 창조의 완성’과 ‘우리의 투신과 투쟁’
 
2016. 04. 03발행 [13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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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⑥그리스도교 영성, ‘성삼위의 본체적 관계’와 ‘지구촌 차원의 연대’, ‘성가족’과 ‘공동의 가정’, ‘새 창조의 완성’과 ‘우리의 투신과 투쟁’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관대하게 헌신(투신)하라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여정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십니다”(245항).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본체적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에 집중되어 있다.

회칙은 하느님께서 성삼위의 그 본체적 관계들이 지닌 마침 없는 그 ‘활력’을 이 우주의 천지만물 사이의 무궁무진한 관계들 속에 새겨 넣으셨다고 고백한다(240항 참조). 이는 하느님을 (혹은 종교를) 순수한 관념의 영역, 세상 및 역사와 무관한 영역, 기껏해야 하위문화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려는(62항 참조) 태도에 대해서 교회의 신앙을 근거로 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에는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 있다. 교종 자신도 보이지 않는 분께 대한 이 신뢰가 마치 “찾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속 깊은 곳에 잠수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도 “그런 경험을 자주한다”고 고백한다(「복음의 기쁨」 280항). 그리고 회칙은 그 모호함이 우리 “인간의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어두워”지고 “취약”해진 탓으로 본다(239항 참조).

보좌 사제로 사목할 때, 어린이에게 했던 강론 가운데 아직 잊지 않는 내용이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하늘이 잔뜩 흐렸다. 낮에도 그랬고 늦은 오후에도 그랬다. 그래서 온종일 날씨가 흐리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실재’가 그랬을까? 아니었다. 밖과 안 그 사이에 있는 유리로 된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더니 너무나 맑았다. ‘하늘’이라는 ‘실재’(reality)가 흐린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창’이라는 관찰의 도구 곧 ‘관념’(idea)이 흐렸던 것이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길로서 교종은 ‘관상’과 함께 ‘외출’을 권한다. “하느님과의 친교, 다른 사람과 친교, 모든 창조물과의 친교”를 위해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나와 “우주 전체에 걸쳐 엮여 있는 무수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탈출’(exodus)을 말이다. 그 탈출은 맹목적 방황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과 ‘성화’의 거룩한 동행의 여정이다. 그 동행의 여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촌 차원의 연대”라는 영성이 필요하다(240항).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는 “모든 삼라만상의 여왕이며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지혜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예수님을 돌보셨고, 그분의 죽음을 함께 하셨고, 들어 높여져 그분과 함께 계신 마리아께서는 이제 모든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241항 참조).

마지막으로 회칙은 ‘나자렛의 성가족’을 돌보신, “자신의 노동과 관대함으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돌보고 보호하신”, 특히 “부당한 자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신” 성 요셉을 소개한다. 교종은 자신의 첫 공식 외부 행사로서 람페두사를 방문하여 참회의 미사를 봉헌했을 때, 무수한 난민의 죽음을 우연한 불행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헤로데’의 불의한 폭력과 우리의 ‘무관심’이 초래한 ‘사건’으로 보았음을 연상시킨다. 회칙은 요셉처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242항)이 되자고 호소한다(242항 참조).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관대한 헌신(generous commitment, 투신)을 불러일으키시고, 당신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청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을(way)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빛과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이 세상 한가운데에 현존”하시며,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대지에 확실하게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갈 새 길들을 찾게 해주시기” 때문이다(245항).

그러니 그동안 우리의 무모함으로 공동 가정인 이 행성에 가한 자멸적 상처가 심각하여 가히 ‘재앙’의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 희망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자. 우리의 공동 가정을 돌보려는 우리의 투신과 투쟁은 “천상의 잔치”에 입고 갈 예복임을 기쁘게 받아들이자(244항 참조).

 

오, 주님!

당신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게 하시고.

저희가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하게 하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정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 사랑의 나라, 아름다움의 나라,

다가오고 있는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교종의 ‘삼라만상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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