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정신을 생각한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7-07-13 11:57:29    조회 : 188회    댓글: 0


[시론]시대정신을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 사회학


입력 : 2017.07.11 20:53:02 수정 : 2017.07.11 20:55:30

 

지난 몇 달 내 머릿속을 지배한 말은 시대정신(Zeitgeist)이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해 ‘국가비전 및 프레임 태스크포스(TF)’ 단장을 맡았기에 시대정신을 고민해야 했지만, 시대정신은 오래전부터 탐구해온 사회학적 주제였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TF의 공식적 견해가 아니라 사회학 연구자의 개인적 의견임을 미리 밝혀둔다.

 

[시론]시대정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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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이란 개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에 기원을 둔다. “그대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로 매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저자(著者) 양반들 자신의 정신이라네.” 스승 파우스트가 제자 바그너에게 건넨 말이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추구되는 지식인들의 정신이 시대정신이라는 게 괴테의 주장이었다. 이후 시대정신은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 방향을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현대사의 시대정신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에 부여된 시대정신은 ‘나라 만들기’였다. 그것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로 구체화됐다. 산업화의 목표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있었다면, 민주화의 목표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데 있었다. 시대정신으로서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우리나라를 비서구사회에서 선도적 근대화를 일군 모범국가로 발전하게 했다.


문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놓인 자리다. 경제적 차원에서 저성장과 불평등이,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불안과 분노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이뤄왔다. 더하여,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다음 세대 부담이 증가하는 인구절벽의 가시화와 무한경쟁·승자독식·각자도생으로 특징지어지는 공동체의 해체 경향이 미래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지나간 시절은 자랑스러운데 다가올 나날은 고뇌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현주소였다.


다른 하나는 시대정신의 주체다. 이제까지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제시해온 이들은 지식인과 정치가들이었다. 국민 다수는 시대정신의 수용자들이었다. 이론과 실행 간의 역할 분담이 이뤄진 셈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국민이 시대정신의 새로운 생산자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정보사회의 진전과 이에 따른 집단지성의 등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 많은 국민들은 스스로 전문가가 됐고, 나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게 됐다.


이러한 흐름을 나는 ‘주권자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주권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근대적 국민’이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을 강조한다면, ‘주권자 국민’은 의사결정의 위임을 넘어 국민주권의 실질적 행사를 중시한다. 국민 개개인이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주권자 민주주의야말로 2016년 촛불시민혁명의 정신이었다. 시대정신의 주체가 국민인 새로운 국민주권 시대가 이제 막 열리고 있다.

 

<파우스트>로 돌아가면, 바그너는 파우스트에 답한다. “이 세계! 인간의 마음과 정신! 모두가 이것들에 대해 무언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30년을 맞이한 2017년 현재 시점에서 국민이 소망하는 시대정신이란 뭘까. 어떤 이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제2의 산업화를, 또 어떤 이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심화되는 제2의 민주화를 말할 것이다. 다른 이는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실현되지 못한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평(公平)한 나라를, 또 다른 이는 분단된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민족통일을 시대정신으로 제시할 것이다.


오늘날 시대정신이 단수(單數)일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의 복합성을 고려할 때 시대정신은 복수(複數)로 존재할 수 있다. 저성장과 불평등을 해결하고 불안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선 4차 산업혁명이 선도하는 새로운 산업화, 노동 존중과 성평등을 추구하는 새로운 민주화, 공평이라는 원칙의 제도화,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반을 둔 통일 준비 등이 더없이 소중한 시대적 가치들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의지다. “소중한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네. 그러나 삶의 황금 나무는 초록색이지.” <파우스트>의 또 다른 주인공 메피스토펠레스의 언명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볼 수 있듯 시대정신은 국민의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의미를 완성한다. 국민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바꾸는 시대정신의 구현이 문재인 정부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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