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과 종전을 세계보편윤리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7-12-28 11:20:44    조회 : 182회    댓글: 0

 

[사유와 성찰]반전과 종전을 세계보편윤리로

원익선 원광대학교 정역원 교무

입력 : 2017.12.15 20:59:00 수정 : 2017.12.15 20:59:46

 

[사유와 성찰]반전과 종전을 세계보편윤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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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십자군전쟁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 기록에서 이 시대에도 지도자들이 십자군전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처칠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향해 십자군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친구에게 제2차 세계대전을 선과 악의 대결인 십자군전쟁이라고 말했다. 또한 전쟁을 앞두고 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도 한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미국이 다국적군과 함께 공격하기로 한 1991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나와 “신의 이름으로” 응징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전쟁을 신은 좋아할까. 무엇보다도 신은 인간이 가른 상대적인 선악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을까. 그리고 과연 정의의 전쟁은 있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있다고 한다. 교부 오거스틴은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더 작은 악은 허용된다고 한다. 인간과 사회의 죄성 때문에 의로운 전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나 단체를 선제공격한다는 부시 독트린에서 보듯이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소명을 가진 미국의 전략에도 나타난다. 2001년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가한 공격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전쟁으로 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공화당 중심의 신보수주의를 일컫는 미국의 소위 네오콘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정치인들의 표는 바로 종교로부터 나온다. 전쟁을 성전으로 보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전쟁을 십자군전쟁으로 본 것이나 베트남전쟁을 악으로부터 선을 지키는 성전이자 파견군인들을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라고 한 것도 다 공산주의에 대한 종교인들의 혐오를 잘 드러낸다. 이미 역사는 십자군전쟁이 유럽 대륙의 권력욕과 물욕에서 일어난 것임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 진영의 전쟁을 여전히 양쪽에서는 십자군전쟁으로 보고 있다. 이슬람권은 십자군전쟁에 대한 응전이라고 한다.


참된 평화를 목표로 하는 종교는 평화적인 수단에 의한 평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예수는 자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벤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성서> 마태복음)라고 했다. 무함마드 또한 아벨을 죽인 카인 건으로 알라는 “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단순한 인간 도살과 지상에 악의 씨앗을 뿌리는 범죄 이상이며, 마치 온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다”(<쿠란> 식탁의 장)고 규정했다. 가르침이 이처럼 분명함에도 지도자들은 종교를 빙자해 백성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한다. 우리는 칼이 문제가 아니라 칼을 들게 하는 자들이 문제임을 알고 있다.


오직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 세계는 매일 수천억원을 군비에 쓰고 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문명은 언젠가 세계 전면 핵전쟁으로 자멸할 가능성이 있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의 열쇠다. 이 열쇠를 손에 넣기까지 인류의 생존은 앞으로도 의심스럽다”고 걱정했다. 줄였음에도 아직도 강대국은 수천발의 핵무기를 쌓아놓고 있다.


그리고 북한마저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한반도는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아니 이미 전 세계 400여기의 원자력발전소는 재래식 무기의 공격만으로도 1기당 반경 수백㎞ 이내를 불모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


세계에 살생을 내건 종교는 없다. 종교의 다양성이야말로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평화를 위한 숭고한 경쟁이 종교의 역할이다. 종교가 정치권력에 굴종하거나 유착하는 한 전쟁의 도구가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없다. 근대 일본의 국가신도, 나치에 투항한 독일의 기독교, 남베트남 고딘 디엠 정권과 가톨릭, 이슬람 근본주의와 지하드(성전), 로힝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의 불교계 등이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는 바람에 이 지역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 되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지위는 유엔이 결정한 것처럼 대화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제는 종교적 양심이 나설 차례다. 폭력과 원한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정의로운 전쟁은 없으며, 지구 위 어떠한 전쟁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야 할 때다. 그리고 반전과 종전, 평화 구축과 대화를 세계 모두가 존중해야 할 제1의 보편윤리로 확정해야 한다. 무모한 전쟁으로 인류의 정신이 더 이상 피폐해지지 않도록 이 폭주하는 야만성을 길들여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혼을 나누어 갖고, 부처님과 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을진대 어떻게 이웃을 죽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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