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에 대한 의존에서 커뮤니티에 기반한 자립으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8-01-03 21:05:37    조회 : 186회    댓글: 0

제도에 대한 의존에서

커뮤니티에 기반한 자립으로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ecosociety@hansalim.or.kr

멘붕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엄청난 변화가 나(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구체적인 변화의 방향과 영향이 뭔지는 알기가 어렵다면 당혹스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처한 모습이 이와 비슷하다. 경제, 사회, 정치, 생태계 전반에서 위기적 현상들이 복잡하게 동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미래 전망을 어렵게 하는 불확실한 경제상황, 고령화·저출산·1인가구 증가 등에 따른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1) 북한 핵개발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상태, 예측할 수 없는 기상변동과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도전적 과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여기에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확인되고 있는 모순적인 현상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소위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유토피아적 전망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실시간 소통과 플랫폼을 통한 정보 공유가 가능해진 시대인데, 다른 한편에서는 가짜 뉴스로 불신이 확산되고 선택적 쏠림 현상에 따른 사고의 획일화 경향도 강화되고 있다. 또한 한편에서는 부와 권력이,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과 불안이 양극화된 채 세습되는 구조도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피로사회, 과로사회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과잉노동으로 소진되고 있고,2) 또 다른 누군가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생존에 대한 불안감으로 힘들어 한다. 특히 70%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대학 진학률을 가진 나라에서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진 청년들이 높은 실업률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3)

 

국가나 기업의 경제적 성과가 개인 소득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통해 행복한 삶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은 효력을 잃어버렸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소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사회적 불안정과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삶의 의지처이자 보호막으로서 국가나 기업, 가족 단위가 담당해왔던 역할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경험과 지식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인식들이 확산되면서 소위 ‘멘붕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현상처럼 미래에 대한 헛된 희망보다 현실에서 작지만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는 움직임들은 이런 시대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개인 차원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개인적 일탈의 차원을 넘어서 거시적 구조 변동과 미시적 생활의 변화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사회적 전환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확장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이 점에서 그동안 익숙하게 의지해 온 구조나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이 생기고 보편타당하다고 믿었던 고정관념이 흔들리는 멘붕 시대의 등장은 위기와 함께 전환의 새로운 기회가 확장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정상의 회복을 넘어 전환을 모색할 때

30년 전 6월 민주항쟁이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다면, 20년 전 IMF 사태는 신자유주의를 통한 자본의 자유를 확대시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맞게 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한계를 세계적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대안에 대한 다양한 모색들이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을 가지고 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일으킨 촛불혁명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에 대한 폭발적인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촛불혁명은 부조리와 관행을 뿌리 뽑아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겠다던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켰다. 이후 새로운 정부의 등장과 함께 지난 정권 핵심 역할자들의 국가 권력 전횡과 사유화 사례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정상사회, 정상국가를 회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고,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積弊淸算) 노력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오랫동안 쌓여 뿌리박힌 낡고 해로운 것(積弊)’을 ‘깨끗이 정리(淸算)’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공공기관 취업비리 등에서 확인되듯이 기득권 집단이 공정성을 훼손하면서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잘못된 관행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려온 사실이 새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의 시대 상황에서 정상의 회복만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어렵다. 문제 원인을 누군가로 대상화하고 해결 또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시민들의 힘으로 혁신과 전환을 함께 이루면서 삶의 방식과 내용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풀뿌리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촛불혁명을 통해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물음이 제기되면서 주민투표, 주민발의, 주민소환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이 분출되고 있다. 여기에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통한 숙의민주주의의 실험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의 폭을 확장시켰다.4)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의의 범주가 행정과 제도권 정치 영역에 머물러 있고, 지역과 마을, 생활 속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히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현재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분권화에 대한 논의의 흐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분권화를 통해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이양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상 충분한 정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실생활과 밀착되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분권화가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분권화 논의는 중앙권력의 지방 이양(사무분장, 재정권 이양)에 주로 맞춰져 있어, 중앙으로부터 넘겨받아 더욱 강화될 지방권력, 특히 자치단체장, 지방관료, 지방의회 등에 대한 주민들의 감시 및 견제 방안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따라서 커뮤니티 전략을 통해 주민 자치력을 강화하고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의 결합으로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개헌 논의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고 있는가?

 

‘헌법’ 개정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해당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지난 촛불집회는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헌법의 가치를 확인시켜주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 1항을 시민들은 광장에서 목청껏 외쳤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을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터다. 그래서 촛불시민들의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을 헌법에 제대로 담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각 영역별로 헌법 개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으나 이것을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전망으로 종합해서 헌법 개정에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책임 있는 단위는 잘 보이지 않고 사회적 공론화 과정도 부족하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선거에서의 유불리를 계산하면서 권력구조 개편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지금의 87년 헌법이 당시 6월 시민항쟁을 통해 이루어졌음에도, 막상 운동 주체들은 배제된 채 군부독재와 자유주의 정치세력, 자본 영역의 타협으로 그 내용이 작성되었던 과오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생명권, 농업, 미래세대, 평화, 노동, 젠더, 사회적경제 등 헌법에 담아야 할 가치는 매우 많다.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거래하고 협상하는 방식으로 헌법 개정 논의가 흘러가서는 안 될 일이다. ‘선진국 따라잡기식 발전모델’이 효력을 상실한 지금 상황에서 헌법개정 논의가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이정표를 세우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때, 광장으로 불러낸 헌법적 가치가 비로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긴축緊縮과 각축角逐의 시대, 협동을 통한 공존의 지혜

저성장이 장기화되고 고착화되는 가운데 과잉생산, 과잉공급, 과잉소비 시대를 더 이상 기대하기는 어렵다. 2018년 경제동향으로 세계 경제는 소폭 회복세가 전망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경제는 올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5) 고용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 가계부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부동산 규제와 함께 대출 억제 조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단계별로 기준금리가 인상됨으로써 서민들의 경제생활은 더욱 힘들 전망이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소득주도 성장을 위한 대책들을 내놓고 있으나 단기간에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이런 가운데 양극화 확대와 함께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짐으로써 생존을 위해 소비와 지출을 줄여야 하는 소위 ‘긴축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여기에다 개인과 사회, 국가를 막론하고 힘을 앞세운 양보 없는 대결구조가 새로운 ‘각축의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념과 이익 갈등이 확산되고, 국가적으로도 미중일 강대국과 북한이 힘을 앞세운 양보 없는 대결을 펼치면서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각자도생은 공멸의 시기를 앞당길 뿐이다. 더불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존과 상생의 시대를 시민 당사자들이 협동의 힘으로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삶의 자립기반을 강화해감으로써 사회적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래세대인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현재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를 중심으로 청년창업을 독려하고 지원하는 움직임들이 활발한데, 청년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사업체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이 이것을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사회 경험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어 사업적 성공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청년들의 패기와 열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청년일자리 문제를 ‘청년’이라는 특정 세대와 ‘일자리’라는 특정 영역으로 제한해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패와 낙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과 지역적 기반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며, 이를 위해 사회 전체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재난의 일상화 시대, 삶의 안전망도 협동의 힘으로

기후변화와 지진 등 자연재해가 현실화되고 있고, 원전과 GMO 등 기술적 통제능력을 넘어서는 위험 요소들이 확산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살충제 계란, 생리대 파동 등 화학물질오염이 우리가 먹고 숨쉬고 생활하는 곳 깊숙이 들어와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6) 이처럼 재난이 일상화되면서 생존과 안전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생존과 안전 욕구는 매슬로우 욕구 5단계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만큼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이를 다루는 접근 방식이다. 흔히 재난과 사고가 발생하면 정부는 규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이것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조직을 만들고 키워 왔다. 한마디로 행정 조직과 제도는 관성적으로 위기를 먹고 자란다. 그런데 그동안 무수히 경험해 온 것처럼 무책임과 무능, 비효율의 문제를 피하기 어려운 관료조직의 인력과 예산을 확대하는 것에다 재난이 일상화되는 시대의 삶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 수년째인데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었다. 결국 정부에 대한 불신은 생존키트나 생존배낭 구입 열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된 대응 또한 답이 될 수는 없다. 두려움을 소비하거나 문제해결을 위탁하는 방식을 넘어서 시민들이 당사자가 되어 협동을 통해 삶의 안전망을 튼튼하게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재난 있는 곳에 생협이 있다’는 말처럼 재난 발생 시 현장에 밀착해서 조합원들의 힘을 모아 긴급구호 활동을 펼쳐온 일본 생활협동조합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다양한 돌봄활동과 생활경제 지원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 현실에서 생활권 단위로 상호 돌봄을 통한 삶의 안전망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최근 주목받고 있는 마을공동체와 사회적경제운동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커뮤니티 단위로 사회적 신뢰 기반이 튼튼하게 마련될 때 정부의 재난대책 기구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에 밀착된 시민사회운동, 제대로 가고 있나?

국가와 시장의 실패에 대한 보완 또는 대안의 영역으로서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 경우 여기에다 정당정치의 실패를 대신하는 역할까지 시민사회운동이 맡아서 정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는 물론 정책 제안과 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들을 활발히 펼쳐 왔다.

 

우리나라 시민사회운동은 87년 민주화 이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빠른 성장을 해왔고 사회적 신뢰도와 영향력 또한 상당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의 역할과 방향에 많은 변화들이 나타났다. ‘시민없는 시민운동’, ‘대안없는 비판집단’, ‘정권의 이중대’ 등 다양한 시선에서 문제제기들이 있었고, 보수성향의 시민운동단체까지 등장하면서 시민사회운동 내에서도 이념적 갈등구조가 생겨났다. 특히 지난 보수정권하에서 정부와 시민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문제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결과다.

 

그런데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와 시민사회운동 영역 간의 관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협치의 시대’라는 말처럼 문제해결을 위한 정부의 공동 파트너로서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시민사회 영역의 발전을 위한 제도적 지원 기반도 만들어지고 있다. 지역공동체활성화기본법, 시민사회기본법, 사회적경제 3법사회적경제기본법, 사회적가치 실현 기본법, 사회적경제기업 제품 판로지원법 제정과 생협법 및 협동조합기본법 개정, 사회적기업육성법 개정 움직임 등 시민사회 영역과 밀접한 내용의 법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정과 개정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이들 각각의 법안들이 가진 취지 및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시민사회 영역과 밀접한 과제들을 법과 제도를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향후 시민사회운동과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운동과 제도가 가진 길항관계를 분명히 확인하는 동시에 시민사회운동이 가져가야 할 본질적인 역할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원론적일 수는 있지만 시민사회운동의 목표가 권력과 제도의 변화에 머무를 수는 없으며, 사회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서 자립과 자치를 통해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생활영역에서의 작고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연대와 협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나는 힘을 길러내는 노력이 제도 과잉의 시대를 맞아서 더욱 중요해졌다.

 

사회적경제 영역은 제도의 과잉 흐름에서 자유로운가?

사회적경제 영역 역시 의존과 자립 사이에서 중요한 선택의 지점에 서 있다. 최근 들어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다양한 대책들이 쏟아지듯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회적경제 영역을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중요한 기반으로 바라보는 현 정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저성장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 등을 통한 노동자 소득 향상이 소비를 촉진시키고, 이것이 경제적 활력 및 일자리 창출과 함께 분배의 형평성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기대다. 하지만 자영업 비중이 유난히 높은데다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우리 현실에서 소득증대를 통한 ‘분수 효과’를 이끌어내기는 쉽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협동을 통한 사회적경제 영역의 역할에 주목하게 되고, 정부 차원에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제도 개선과 다양한 지원 방안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부작용과 한계를 분명히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의 영역으로 사회적경제의 활성화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경제 활성화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적경제의 빠른 성장 및 확장을 위한 공공부문으로부터의 지원 확대 방식이 사회적경제 활동을 펼치는 민간 주체들의 자율성과 자립 및 자치력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적경제의 실질적 성과목표가 일자리 창출에 맞춰진 채 공적 재원이 투입될 경우 민간 주체들의 역량과 제도적 관성 사이의 간극에 따른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공적 재원 사용의 투명성과 효과성 부분은 당연히 행정감사나 국회 및 지방의회로부터 검증 받아야 하고, 따라서 사회적경제 영역 역시 연간 단위로 투입 대비 가시적 성과를 창업이나 고용인 수 등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정부 지원을 받은 기존 자활기업, 사회적기업들이 경험했던 바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당장 가시적 성과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사회적경제의 실질적 성공과 역할을 위해 매우 중요한 민간 주체들의 역량 강화와 관계의 질을 높이는 노력은 소홀히 다뤄질 수밖에 없다.

 

자율과 자립, 자치로 삶의 양식을 새롭게 하고 공동체적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데 대한 사회적경제 차원의 전망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국 정부 주도(또는 지원)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거나 제도영역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국가가 독점해 온 공공 영역을 지역 커뮤니티 차원으로 되찾아오고, 이윤을 중심으로 한 시장의 자유경쟁에 노출된 사적 영역을 공동체적 원리로 재구성해서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적경제 운동이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생태계 조성도 사업단위의 기능적 네트워크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마을단위로 공동체, 학교, 민주주의, 재생, 돌봄 등 다양한 영역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삶의 경로와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행복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최근 들어서 ‘마을’과 ‘공동체’가 강조되고 ‘협동’, ‘치유’, ‘돌봄’, ‘재생’의 가치와 새롭게 만나고 있다.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노동과 학습, 생활이 어우러지고 생산과 소유, 생활양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행복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노력이 중요해졌다. 시간을 표준화하고 공간을 상품화하여 공동체 해체와 생태계 파괴의 부작용을 만들어온 기존의 성장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해 삶의 터전이자 관계성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공간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행복한 삶을 위한 공간 전략으로서 그 역할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안전한 삶의 공간이다. 침범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면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자급·순환하고, 돌봄과 치유, 재생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하고 미더운 신뢰의 공간이 중요하다.

둘째, 열린 공동체로서 공간이다. 안팎으로 열려있어 낯선 이들도 거리낌 없이 찾아와 머물 수 있는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환대의 공간이 중요하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차별 없이 연대하는 따뜻한 삶의 안식처를 단계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셋째,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간이다. 활발한 모임과 교류, 체험활동으로 경험을 공유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의 성숙과 관계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넷째, 창조와 생성의 공간이다. 공간을 바꾸는 것과 삶을 바꾸는 것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협동의 가치와 원리로 비자본주의적인 생활양식을 익히고 실천하는 실현지이자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공유지로서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노력도 중요하다.

대안적 가능성을 가진 공간들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데 있어 생활협동운동의 역할도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장경제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생산과 구매 활동만 가지고 서로의 생명과 생활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인 의미로서 생산(지)과 소비(지)를 기능적으로 구분하고 직거래하는 방식을 넘어서 자급력과 자치력이 높은 생활공동체 영역을 다양하게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중요해졌다. 최근 들어 생활협동운동 영역에서 먹거리 외에 돌봄과 같은 생활 속 협동운동의 과제들을 다양하게 찾아내고, 지역사회의 다양한 파트너들과 협력해 지역살림을 위한 실천 활동을 함께하려는 모습들이 구체화되고 있는 점은 의미 있는 일이다. 행복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생활협동운동의 보다 많은 노력과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1) ‌2017년 우리나라 출생아동수는 40만 명 이하로 합계출산율 최저수준이 예상되고 있으며, 고령화 추세도 OECD 국가 중 가장 빠르다. 이런 저출산, 고령화 현상 속에서 청년층 인구비중은 급격히 줄어들고, 은퇴연령층 비중은 빠르게 증가하여 사회적 부담도 매우 커지고 있다.

2) 2‌016년 기준 우리나라 연평균 노동시간(2,069시간)은 OECD국가 연평균 노동시간(1,763시간)보다 306시간 더 많아 1년에 1.8개월 더 일하는 구조다.

3) 2017년 10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8.6%로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4) 물‌론 원전과 같은 논쟁적이면서 결정의 파급력이 큰 사안을 제한된 숙의 기간을 거쳐 의사결정의 수단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숙의민주주의의 원리에 비춰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5)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빠르게 증가해 1,400조 원을 넘어섰고, 가계부채의 질도 매우 나빠져 가계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부담비율이 12.5%로 1년 전보다 0.7% 상승해 1999년 후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6) ‌화학물질의 유해성 논란이 커지면서 케미포비아chemifobia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2018년 하반기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 시행할 예정이다.

 

* 『모심과 살림』 11호(2017-18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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