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믿음이란 성공할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2016년 다해 6월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주님께 소리 질러라, 딸 시온의 성벽아.>
○ 애가의 말씀입니다. 2,2.10-14.18-19
복음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7
학교 수업을 하는데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수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지요. 선생님들도 이 아이에 대해서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는 아이라는 판단이었지요.
더군다나 도무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게을러서 책을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서 이러한 말까지
합니다.
“글도 읽지 못하면서 넌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이 비꼬는 말에 아이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선생님께서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가
작가가 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보기에는 가능할 것 같습니까? 선생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라고 불리는 아이, 더군다나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아이, 작가가 될 수 없는 환경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2008년에 ‘시’분야에서 언론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처상을
받습니다.
바로 시인 필립 슐츠입니다. 그가 글을 읽지 못했던 것은 바보도 또
게을러서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글자를 읽거나 쓰는데 어려운
‘난독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난독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나를 보는 것과 똑같은 시선으로 자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결점부터 보는 일을 중단하고, 스스로를 믿는 순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문제를 우선시할
때 실패할 확률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자그마치 17배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실패할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공할 가능성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는 한 백인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로마의 백인대장으로 나름
힘을 가지고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하셨는데, 그는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백인대장의 위치에 내가 있다면 예수님께 어떻게 청했을 것 같습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직접 들어야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직접
우리 집으로 와 주시기를 그리고 직접 손을 대고 직접 말씀을 하셔야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믿음이란 실패할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실 수가 있으며,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마음으로 원하는 걸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에 가득하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에 나타날 것이다(론다 번).
*****
화를 다스리는 법(‘좋은 글’ 중에서)
자신의 힘이 가장 세다고 자랑하는 헤라클레스가 어느 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중간쯤을 걷고 있을 무렵 사과만한 이상한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힘센
헤라클레스님의 앞길을 방해하다니. 참을 수 없어 에잇!” 하며 그 이상한
물건을 툭 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러자 사과만 했던 그것이 어느새
수박처럼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라? 이게 나를 놀리네?”
어느새 흥분한 헤라클레스는 다시 힘껏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바위만큼 커져 버렸습니다. 더욱 열이 오른 헤라클레스는
이번에는 커다란 쇠몽둥이를 그것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헤라클레스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려 어느새
길목을 꽉 막아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흥분한 헤라클레스 앞에 아테네 여신이 나타났습니다. 아테네
여신은 그 이상한 물건을 향해 웃으며 노래를 들려주자 순식간에 원래
크기로 돌아가 툭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헤라클레스가 아테네
여신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테네 여신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건 논쟁과 불화의 정령이라서 가만히 놓아두면 별것 아니지만, 이것과
싸우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 화를
없애겠다고 그 대상과 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싸움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때 화가 과연 없어졌을까요? 아마 화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화를 없앨
수 있을까요?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지만, 줄어들게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것에 아예 관심을 갖지 않을 때, 그리고 심한 논쟁이나 싸움을 피해
나갈 때가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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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영적 교만과 배타심에서 벗어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마태 8,5-17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Jesus Heals a Centurion's Servant
영적 교만과 배타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군 편제를 본떠 만든 부대의 이교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종의
중풍을 고쳐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지닌 이교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질 조짐을 알아보십니다.
이어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교인의 치유와 시몬의 장모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유다인 뿐 아니라 이교인까지도 구원하러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선택된 민족이 아닌 이교인에게 호의를 베푼데 대해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뿌리 깊은 신념과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마”(98,7) 하셨지만, 자신이
이교인임을 잘 알고 있던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9)하고 아룁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8,10)고 하십니다. 그의 진실한 믿음에 예수님마저 감탄하시며,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8,13) 하십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성체 축성문에서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족보와 혈연, 출신배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태생이 유다인이든 이교인이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분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자주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살고 있고,
신앙생활도 이 정도면 썩 괜찮게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아가 자신만은
구원 받으리라 믿고, 적어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자신을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무서운
착각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다인처럼 나도 자신만을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믿지 않는 이들, 나에게 해코지 하는 이들, 미운 짓 하는
이들, 힘없는 이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편협한
생각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교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신 이 명료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접하면서 우리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모두가 구원에로
초대받았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오셨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의 태도를 보면서 혹자는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흡족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타적인 태도나 영적인 우월감은 때로는 아주
교묘하게 드러납니다. 드러나지 않게 남과 비교하며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 자신보다 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태도, 온몸을
던지는 투신은 하지 않은 채 적당한 노력과 신앙생활만으로 구원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신념, 이런 것들이 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영적 교만과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마음 열어 모두를 받아들이고,
편견 없이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사랑으로 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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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마태 8,13)
여러분은 뭘 믿으시나요?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신앙고백문 말고
실제로 여러분은 뭘 믿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 보면 신앙적으로 성숙해 질 것이라 믿나요?
다녀봤자 그게 그거라 믿나요? 믿는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6.25 기념일인데 여러분은 남과 북이 통일될 거라 믿으세요?
우리 시대엔 불가능할 거라 믿으세요?
우리 국민들 다수가 믿는대로 되지 않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6.25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날일까요?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국방을 강화하고
북한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결의를 다지는 날일까요?
오히려 동족끼리는 이념 때문에 결코 총뿌리를 겨누어서는 안되고
강대국들의 놀음에 놀아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피는 물보다 진함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날일까요?
우리가 믿는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지리산 종교연대는 오늘 5대 종단이 함께모여
지리산에서 이념논쟁의 희생이 된
좌익우익 모든 영령들을 위해 합동위령제를 올립니다.
더이상 이념논쟁의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이 영혼들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더이상 진보보수논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 주장하며
파당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한
여전히 6.25의 영령들은 평안히 쉬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영령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 주십시오.
그리고 진보니 보수니 하지 말고 나와 생각이나 사상이 다른 이들을
깊이 품어주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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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아주 특별한 책, 애가(哀歌)
2016년 다해 6월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마태 8,5-17
아주 특별한 책, 애가(哀歌)
여러 권의 구약 성경 가운데 아주 특별한 책이 하나 있는데 애가(哀歌)
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저자라고 전해지는 이 책 전체는 슬픔을, 특별히
애절한 죽음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애가(哀歌)의 이름이 ‘어떻게’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어떻게!” 하고 통곡하는 외침을 그대로 성경 이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정복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단식하면서 애가를 노래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매 금요일 예루살렘의 폐허를 슬퍼하며 ‘통곡의 벽’ 앞 에서 애가를
부르면서 울고 있습니다.
애가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리신 처벌의 참혹함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때 다윗의 도성 시온은 아름다운 여왕과도 같았으나
이제 그 여왕이 팔려가는 종이 되었음을. 한 때 여왕은 거룩한 도성을
거닐며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이제 원수의 발아래 짓밟혀 신음하고
있음을. 푸른 풀밭에서 마음껏 풀을 뜯던 양떼들은 거친 황야에서 목자마저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음을.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들과 제단들은
산산이 허물어졌고 칼을 피해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음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의 딸 백성이 파멸하고, 도시의 광장에서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눈은 눈물로 멀어져가고, 내 속은 들끓으며, 내
애간장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애가 2장 11절)
그리고 결국 시인은 또 왜 하느님께서 시온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처녀 시온은 처음에는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께
의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거짓된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시인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날카로운 칼로 강하게 내리치셨지만 이스라엘을
산산조각 내시지는 않았다고, 일말의 여지를 남기셨다고 알려줍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지은 죄악이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하더라도
용기를 내자고 힘을 내서 다시 한 번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서자고
간청합니다.
또한 시인은 나라가 그 꼴이 된 가장 큰 원인제공자들은 바로
거짓예언자들과 사제들이라고 고발합니다. 이 시대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가슴 섬뜩한 고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찌 그리 오늘 이 시대 상황과 비슷한 형국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시인은 애가 마지막 구절에서 외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애가 5장 21절)
애가서는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 앞에 드리는 처절하고도 절박한 비탄의
기도입니다. 저는 애가를 읽고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이 아니로구나.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힘들어죽겠을 때,
‘하느님 저 정말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 좀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도 좋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구슬픈 울음과 처절한 외침과 통곡으로 이루어진 애가가 구약성경 가운데
한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주님 현존 앞에 힘들다고 외치고,
‘주님 이거 정말 제게 너무하신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 역시 필요한 영적
노력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 안에 언제나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네 인생 곡선이 언제나 상승곡선만 그려가며
전도양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기에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은 불가능한 것이 분명합니다.
살다보면 분명히 우리가 원치 않던 슬픔의 순간, 추락의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애가의 저자처럼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느님 현존 앞에서
힘들면 힘들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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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2016년 다해 6월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마태 8,5-17
요즘 ‘도마복음 강의’를 읽고 있습니다. 오늘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의 강이 더 깊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나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단 성서에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견, 선입관, 이념, 지역, 학연, 계층,
신분의 벽’이 너무 높아서 우리들은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징을 보았고,
기적을 보았고,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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