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제 서품 기념일이었다.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었지만 벌써 사제로 살아온 시간이 32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선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의 신앙은 더 성숙했을까? 나의 사제 영성은 더 깊어졌을까? 사제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시절보다 지금의 나는 더 헌신적인 사목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선뜻 긍정적인 답을 말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한다. 슬픈 일이다.
세월이 간다고 나이가 든다고 자동으로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세월과 나이는 오히려 타성과 관성에 물들게 할 뿐이다. 부단히 애쓰지 않는다면 현상 유지도 어렵다. 많은 것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쉽게 퇴색되어 간다. 서늘한 현실이다.
늙음, 쇠퇴와 소멸, 성숙과 완성
내가 너무 자주 노화와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들처럼 그저 주어진 자신의 시기를 살아 내지 못하고 왜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시간의 흐름과 노화를 왜 담담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있을까. 젊은 날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는 데 반해, 노년의 시간표 안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보다는 쇠락과 소멸을 전망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까. 노년의 시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성장과 성숙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는 변색과 쇠퇴를 뜻하기 때문일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 “늙어 가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지상에서의) 순례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앙적 신념을 나는 왜 제대로 체화하지 못하고 겁 많고 용렬한 모습으로 늙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지지 못했고 신앙적으로도 깊어지지 못했다는 의미일까.
최근 발행된 시집에서 심보선 시인 역시 늙음의 정서에 관해 노래한다.1) “자신의 존재가 분명 어딘가에 다가가는구나 느끼는 것이 노년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을 보내고 보냈는데 나는 죽음이 여전히 막연하답니다 ······ // 이 비밀스런 여정에서 나는 언제 스스로에게 노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언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말년의 양식2') 생은 늘 답을 알지 못한다.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그저 느끼고 응대할 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늙어 가는 생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생은 착각과 오해와 미망 속에서 건너간다는 느낌이다. “산다는 것은 오해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나는 내 심장을 오해하고/ 내 심장은 생을 더듬거리며 엇박자로 달린다/ 오해로 인해 사물과 인간은/ 아름다움을 하루도 간직하지 못한다/ 그것은 참 이상하고도 슬픈 일이다.”('오해')
노년의 시기에 몸은 노화되지만, 정신과 영성은 더 성숙해지고 깊어질 수 있을까. 물론 정신은 몸과 긴밀히 연결된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도 건강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몸은 늙어 가도 정신과 마음을 더 성숙시킬 수는 없을까. 육체가 노화의 굴곡을 겪더라도 마음과 정신은 더 또렷해질 수 없을까. 노년의 시간에는 몸의 저속 노화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마음과 정신의 깊어짐을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다.
신앙과 영성의 성장
인격의 성숙과 신앙과 영성의 성숙은 비례하는가. 인격의 성숙이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신앙과 영성이 깊어지면 인격도 성숙해지리라 믿는다. 과연 내 32년의 사제 시간 동안 내 신앙과 영성은 성장했는가? 신학생 시절, 젊은 신부 시절 나름 깊었던 사목적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얕아지고, 생각만 많아진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32년을 사제로 살아왔는데, 사제로서의 신앙과 영성이 왜 깊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제로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자동으로 사제의 신앙과 영성을 성장시키지 않는다. 내가 사제직을 형식적으로 수행해서일까. 성사 직무의 사효적 은총이 왜 사제를 성장하게 하지 못하는가. 그 은총을 깊이 깨닫고 수용하면서 스스로 노력할 때만이 신앙과 영성은 성장하는가. 나 자신과 주변의 동료 사제들을 살펴보기만 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생각과 마음과 온몸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지 않는 사제는, 사제로 살아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앙과 영성이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품성사의 은총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사제는 죽는 날까지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매일매일의 수행만이 사제를 성장하게 한다.
사람은 자발적인,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 자발적 능동성을 통한 성숙이다. 또 한편으로 사람은 타자의 영향을 통해,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성장과 성숙의 계기를 갖기도 한다. 일종의 수동성(수용성)을 통한 성숙이다. 사제로서 자기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노력 부족이 핵심 문제이지만, 사제들이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가 양성과 쇄신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앙과 영성의 성장과 성숙은 사제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사제 공동체의 교육과 양성의 문화가 건강하게 형성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물론 모든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이미지 출처 = Freepik)신앙 양성의 현실
사제뿐만 아니라 신자들 역시 그렇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 했다고 반드시 신앙과 영성이 성숙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습관적이고 관행적인 신앙생활이 신앙과 영성의 성장과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과 정성 없이 타성적으로 참여하는 성사 생활이 그 신자의 신앙적 성숙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한 신앙인 개개인의 개별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신앙인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교회의 신앙 양성과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의 삶과 문화 속에서 신앙 교육과 신앙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신앙인들은 본당 안에서 어떤 교육과 양성을 받고 있는가? 본당 공동체 안에서 신앙 교육과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본당 생활이 단순히 전례와 행사 참여, 친목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앙은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신앙은 이성과 정서와 의지의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 신앙 교육은 지성과 감성과 영성이라는 세 차원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교육을 지성으로 축소하면 차가운 추상적 개념으로 전락한다. 교육을 감성으로 축소하면 자아도취로 변질되고, 교육을 영성으로 축소하면 세상과의 접점을 잃고 만다. 지성과 감성, 영성은 오직 서로 의지할 때에만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2) 조금 단순화할 위험은 있지만, 가톨릭 신앙 교육은 교리 교육에 대한 강조와 전례 성사 참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머리와 몸의 차원만 강조한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이 부족하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이 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가톨릭 신앙 교육(양성)의 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성찰이 요청된다.
신앙 교육과 양성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예비자 교리 교육과 특강 형식의 교육만으로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성체 성사 그 자체가 신앙 교육과 양성의 핵심 자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과연 오늘의 미사 안에서 신앙과 영성의 성숙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신앙 양성과 교육의 장으로 체화되고 있지 않는 성체 성사의 현실과 본당의 단기적 강의 형식의 교육으로는 신앙이 제대로 양성되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본당의 신앙 교육 현실에 대한 정직한 분석과 성찰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와 신앙인들은 “자신의 소명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를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표현하려고 노력”3)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일은 복음화와 선교, 신앙 성숙과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사명과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깨달을 때 신앙과 영성은 성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신앙 교육과 양성의 방식은 일방적 가르침의 형식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과 양성은 사명과 목적의식을 일깨우는 방향으로 그리고 시노달리타스 형식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들의 신앙과 영성은 성숙해질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아마도 우리보다 먼저 이를 깨달았기 때문에, 선교하는 교회와 시노달리타스를 강조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1) 심보선,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 아침달 시집, 2025.
2)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김성환 옮김, 한문화, 2024, 40.
3) 리처드 M. 제이콥스 엮음, "가톨릭 교육자의 소명", 최준규·김홍주·박재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5, 151.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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